◈몰랐다가 이제 알았습니다! 창28:16~22, 시104:4 06.12.03.
▲「데이비드 스완」
청교도 작가 나다나엘 호손의「데이비드 스완」이란 작품이 있다.
이 단편소설은, 24살 난 데이비드 스완이
고향을 떠나 보스톤으로 취직하러 길을 떠나던 중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샘터 옆에 누워 단잠에 빠져 있는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먼저 자식이 없었던 부자 상인 부부가 그 곁을 지나다가 잠든 스완을 본다.
그가 어쩐지 그들의 죽은 아들 헨리와 비슷하게 생겼다며 양자 삼을까 하다가
마차를 몰던 하인이 떠나실 준비가 되었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냥 가 버린다.
다음에는 사랑을 찾고 있던 어여쁜 소녀가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벌이, 잠든 그의 얼굴을 쏘려는 것을 발견하고, 벌을 쫓아준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소녀는 그가 잠이 깨기를 기다렸지만
너무 깊이 잠든 그가 좀처럼 깨어나지 않자, 그냥 혼자 길을 떠나버린다.
그 후에는 두 악당이 스완의 보따리를 가져가려고 접근한다.
만일 그가 깨면 처치하려고 비수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는데,
마침 개 짖는 소리가 나자 개 주인(목격자)이 올까봐 그들은 도망가 버린다.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안에,
부잣집 양자가 될 뻔 했던 기회,
아름다운 사랑을 만날 뻔 했던 기회,
또한 강도를 만나거나 살해당할 뻔 했던 기회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 자세한 「데이비드 스완」줄거리 보기 →
▲성경에 야곱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과연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찾아오신 것을, 스완(청년, 소설 주인공)처럼,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나중에는, 야곱은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깨달았다.
그것이 위 성경 구절의 고백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느 듯 금년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금년 한 해 동안에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회들이 지나갔을까?
이제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야곱이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금년에 있었던 ‘하나님의 인도와 개입’을 지금이라도 깨달아 알게 된다면
더욱 보람 있게 12월과 2006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가 각성할 것 - 임재, 인도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셨는데, 나를 인도하셨는데, 내가 몰랐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이런 하나님의 인도를,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왔는가!
설교가 존 올트버그 John Ortberg 는 이런 현상을 ‘영적 방심’이라 지적했다.
죠지 버나드쇼의 희곡 「세인트 존」에서 어떤 등장인물이 주인공 아크 존에게
“하나님은 항상 당신에게는 말씀하면서 왜 내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 때 존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항상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당신이 듣지 못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104:4
(하나님은 바람과 불꽃도 천사로 삼아서 역사하신다는 뜻)
두 사람이 꼭 같은 책을 읽었는데, 한 사람은 감격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무엇을 읽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차이가 무엇일까?
십중팔구 그는 집중하지 못한 채 방심하고 읽었기 때문이다.
▲어린 사무엘도 그런 경험을 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 번씩이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지만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모르고 있었다.
엘리 제사장의 도움으로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 음성인줄 알지 않았는가!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 아버지 이삭에 의해 처갓집으로 보내졌다.
에서를 피해서, 거기 가면 아내를 얻고 새 출발 할 수 있다고 해서 떠났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목숨을 보존하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한
실낱같은 가능성에 인생을 걸고 가는 길이었다.
그는 외로웠고 두려웠다. 그가 이렇게 홀로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벧엘이라는 들판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 밤에 그는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고
이어서 사다리위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때 그는 소스라쳐 놀라 깨어 일어나며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비로소 형에게 쫓겨 먼 길을 가고 있었던 그 피곤한 여행길에도
또한 아무도 없는 외롭고 무서운 빈들에서 한 밤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이 거기 계셨던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 아침 야곱이 깨어 일어나던 그 순간,
그는 영적 방심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런 순간을 영적 각성의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영적 각성이 필요하지 않는가?
▲저의 영적 각성
얼마 전 제 둘째 아들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치러놓고
10월 초 발표 날이 가까워지자 지나치게 초조했다.
마침 우리 교회 직원 수련회가 설악산에서 있어서 같이 가자고 권했다.
거기 가서도 아들은 안절부절 했다.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제가 ‘자자’고 해도, ‘아빠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지,
당사자인 제가 잠이 오겠어요?’ 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그냥 신경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제가 먼저 잠을 청했다.
새벽에 일찍 깨어 보니까, 아들이 늦게 잤는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 그날 새벽처럼 제 아들이 잠든 모습을 그렇게 오래
지켜본 적은 없었다.
저는 그 새벽 제 아들 곁에서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이런 독백을 했다.
‘내가 네 맘을 왜 몰라? 다 알지...
지금 넌 모르지만, 내가 너 이상으로 걱정하며 이렇게 네 얼굴을 보고 있잖아!’
그 순간 제 뇌리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우리는 몰라도 내가 내 아들 침상 곁에서 그의 얼굴을 주목하듯,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 때 제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섬광처럼 솟아난 말씀이 있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시1214:~5
그날 새벽이, 제게는 영적 각성의 시간이었다.
▲그럼 여러분께 다시 물어보는데, 우리가 지금 각성할 것이 무엇인가?
→ 우리는 몰랐지만,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내내 그러셨다.
그분의 임재, 그분의 인도를 이제라도 각성하자!
그리고 난 다음, 우리가 결단할 일이 있는데...
◑2. 우리가 결단할 일
야곱은 두 가지를 결단한다.
①평생에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고,
②십일조를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다.
▲평생 예배하는 삶
야곱은 지난 밤 베개 삼아 잠을 자던 돌을 기념비로 기둥처럼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은 다음
여기가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한다.
일종의 예배의식이었다.
하나님을 진정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긴다.
우리에게 진지한 예배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을 진지하게 만난
체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년 한 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했는지 한 번 돌아보자.
온전한 예배 없이 쓰임 받는 생애를 살아갈 수 없다.
크리스천은 예배의 성공 없이, 인생에 성공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예배에서 은혜 받고, 예배에서 새 힘 얻고, 예배에서 비전 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밀이다.
내년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서,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는
그런 한 해가 되시기를 소원하시기 바란다.
▲기적이 없는 것도 좋다
어떤 성도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한다.
“아니, 야곱의 체험처럼, 제게도 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임재를
분명히 알려주신다면 저도 야곱처럼 헌신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발상을 전환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시라!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일일이 간섭하시고 지시하신다면,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결단도 선택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성숙한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은, 기적으로 우리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시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명백한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이 원리를 붙잡고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어떤 자식들이 커서 데이트 하러 가는데,
부모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할지 등등
모든 것을 다 지시하고 결정해 준다면 그것이 과연 자녀에게 좋겠는가!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의 인도, 임재가 분명하지 않아도 고민할 필요 없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지도 않지만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
그래서 기적 같은 임재의 체험이 매일의 삶에 비록 없어도
매일 ‘말씀의 원리를 따라’ 최선의 결단을 하면 된다.
식당에 가면, 당신은, 누가 일일이 선택해 주는 메뉴를 말없이 받아먹겠는가?
그것이 행복한 삶이겠는가?
이제 연말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 몰랐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주님이 저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을요!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 온전히 예배하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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