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만 있어도 불길은 다시 일어난다 사6:13 06.05.10.
역사상 불씨가 꺼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수의 불씨는 매우 중요하다
불씨는 비록 ‘작은 불’이지만, 큰 불길로 번질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불씨만 남아있으면, 다시 새롭게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한 두 사람만 깨어있어도, 비록 한 두 사람밖에 안 된다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릴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1. 일제시대 1930년대에, 우리나라 독립군이 있었다.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계셨는데, 따르는 병력은 1천명도 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의 군대 중 하나였다.
그런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력을 비교하자면 만對일의 차이라고 할까?
독립군은 솔직히 군대라고 보기도 어려운 소규모 저항군이었다.
그 독립군 활동이, 사실 일본군을 격파하고 분쇄하려던 싸움이었던가?
아니었다. 그 소수의 병력과 무장을 가지고는 절대 판세를 바꿀 수 없었다.
아무리 목숨 걸고 잘 싸워도, 절대 일본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가 없는 투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 역사에 독립군이 하나도 없었다면
일제 36년 통치 기간 동안 아무 저항 없이 지내다가
외국 군대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쌍한 역사가 되겠는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기록에 남는 것은
독립군들이 싸운 이야기들, 상해임시정부에서 투쟁했던 역사들,
거기 뿌리에서부터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다.
절대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지만, 가치가 있는 싸움이었다.
실제로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에 가 보면
조그만 3층 건물이다. 청사라고 말하기도 거북스러운,
그냥 당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숙소 비슷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런 건물과 모임이라도 존재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를 거기서부터 찾는다.
<우리는 결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는 역사가 자리매김 된 것이다.
그것은 비록 지더라도, 큰 의미가 있었던 싸움이었다.
일제시대 때 실리를 추구했던 사람들(친일파)은...
당시 출세하고 잘 살았다. 당대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통성을 그들에게서 찾는 것은 아니다.
저항했던, 가난하고 배고팠던, 당대에 실패자였던
독립군과 임시정부에서 찾는다.
▲2.인도네시아 는 430년간 네덜란드의 압제 하에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 역사를 보면, 430년간 거의 저항이 없었다.
그러다가, 1825년에 어느 부족의 왕자 디뽀네고로 가
처음으로 식민지 정부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왕족, 지방통치자, 농민, 이슬람교도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5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결국 디뽀네고로 왕자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마까사르 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독립 역사는 그 왕자의 저항에서부터 뿌리를 찾는다.
만약 그 왕자 한 명도 없었다면, 430년간 인도네시아는 도대체 뭐 했는가?
▲3. 타이완은 일본의 압제를 당했을 때, 눈에 띄는 저항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타이완 정부의 역사에 별로 할 말이 없다.
일본 사람을 환영해서 같이 살았다는 역사뿐이다.
중국 사람에게 눌려 사는 것이나, 일본 사람에게 눌려 사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참 약하고 부끄러운 역사이다.
▲4. 신사참배 거부로 신앙의 불씨를 지키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모든 조선교회가 거기에 무릎을 꿇었다.
장로교만 저항하다가, 그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은
경남노회(현 고신)와 평양의 주기철 목사와 성도들 등이었다.
당시 비율로 따지면, 전체 신자 중에 1%도 되지 않는 작은 숫자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는가?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에게서 찾지 않는가.
‘한국 교회는 우상숭배에 저항했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지금도 우리는 ‘한국교회는 절대로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의례가 아니라 우상숭배였다!’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순교자의 공로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당시의 순교자들의 모습은... 비참한 ‘실패자’였다.
그들이 죽을 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려와 감옥을 비춘 것도 아니었다.
굶어 죽고, 고문당해서 비참하게 죽었다.
당시에는, 그것은 명백한 개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의미가 있었다. 그 저항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의 뿌리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지더라도 의미가 있는 싸움이었다.
▲5. 본회퍼 목사와 고백교회
2차대전 때 독일에 나치 정부가 있었다.
당시 독일의 모든 국가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했다.
그래서 독일교회와 전체주의국가(나치 정권)가 서로 일치 되었다.
그런데 비율로 따지면 0.1% 정도 밖에 안 되는
본회퍼 목사를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가 있었다.
거기만 히틀러에게 저항했다. 그는, 미친 운전수가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 보다는,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히틀러의 암살 계획에도 가담했다.
그런 저항 운동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당시에 너무 적었다.
그러나 만약 본회퍼와 고백교회가 없었다면, 지금 독일교회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는 히틀러와 동조했던 교회다!’에 뿌리를 찾겠는가?
그러나 본회퍼 때문에, 지금도 독일교회의 뿌리와 역사는 거기서 찾고 있다.
본회퍼는 비록 당시에 미약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날 독일교회가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작은 불씨’였다.
▲시대가 다 타락하고 넘어졌을 때... 숫자가지고 되는 것 아니다.
한 명이 되었든, 두 명이 되었든
믿음의 순수한 불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결국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가게 되고
후대는 그것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 불씨를 지키다
당시대 사람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다 거절했고, 다 배척했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이 그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주께로 돌아왔다.
대표적인 예로,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 책을 읽다가 포로 생활이
70년 만에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9:2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간 후에, 예레미야의 책을 읽고 부흥이 일어났다.
예레미야는 자기 당대에는 많은 멸시와 무시를 당했지만
그가 죽고 난 다음 후대에 그의 글을 통해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도 불씨였다.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직접 큰 부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어두운 시대에 진정한 신앙의
정통성을 간직했던 소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다음 세대에 잘 전수해 주었고, 때가 되니까 불길이 일어났다.
◑불씨를 지키는 인생이 되자
▲1. 우리도 불씨 같은 인생이 되자.
사회에 신앙의 불이 꺼져가고, 소망이 없어질 때
사람 숫자가지고 싸움을 벌이면 안 된다.
더 순수한 믿음, 더 순수한 기도를 통해서, 더 순수한 하나님의 생명에
집중해서, 그 불씨를 잘 보존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작은 불씨를 통해서
나라 전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암담하다고 쉽게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마시라.
당신 가슴속에 불씨만 있으면, 소망이 있다.
절망해서 그 불씨를 꺼뜨리지 말고, 그 마음의 불씨를 계속 지켜나가시라.
때가 되면 그 불씨를 통해 큰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제가 이 교회에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우리 권사님, 장로님들, 불씨였다고 생각한다.
새벽기도를 포함한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열심히 기도해 주셨다.
누가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 기도의 자리를 십 년 넘도록 끝까지 지키셨다.
그 기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고 계셨으니,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불씨가 사방에 확산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사야는 불씨를 다른 말로, 그루터기라는 말로 설명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다고 했다.
다 망해도, 거룩한 씨가 계속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사 6: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생명의 불씨를 잘 지켜 나가자.
▲2. 불씨는 때가 되면 반드시 불을 퍼뜨린다.
작은 불꽃 하나가 꺼지지 않고 살아있으면 결국 온 산을 태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불씨는, 반드시 주위에 옮겨지게 되어있다.
고전 2:4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나오는데
성령의 나타님이란 - 내적으로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곧 불씨다.
성령의 능력이란 - 외적으로 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다윗 한 사람의 불씨가 살아서 결국 모든 사람에게 옮겨 붙었다.
어느 곳이든지, 불씨가 있는 한 사람을 통해서, 그 곳은 전체가 변화된다.
가정도, 정말 기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가정은 반드시 소망 있다.
각 팀 속에도, 한 명의 전도자, 한 명의 봉사자가 결국 나머지 팀원들을
다 불붙게 만드는 역사를 종종 본다.
▲3. 가지치기가 되어진다.
농부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지치기를 한다.
열 개의 가지 중에, 한 두 개의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 버린다.
그래서 한 두 개의 가지에 열매가 풍성히 열리도록 만든다.
자기가 가진 강점에 집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퍼뜨릴 수 있는 불씨에 집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는 가지치기가 정말 어렵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 팔을 잘라내기가 어찌 쉽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가지치기 해 주신다.
그러므로 자기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주님의 섭리를 믿으라.
자기의 강점에 집중해서 그 불씨를 잘 간직하고 더 크게 살려 나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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