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마8:15
▲‘터치’의 차이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의
뉴기니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교육적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은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너무도 기질이 달랐다.
아라페시 족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족속임에 반해,
문두구머 족은 난폭하고 공격적인 족속이었다.
마가렛 미드는 무엇이 이 두 종족에게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는가를 연구했다.
결론은, 두 부족이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라페시 족은, 아이를 작은 그물모양의 가방에 넣어 앞으로 안고 다니면서
엄마와 계속 몸으로 접촉하며 눈길과 손길을 보내고
아기가 원할 때는 언제나 젖을 주었다.
그러나 문두구머 족은, 아기를 넣은 바구니를 등 뒤에 매달고 다녔다고한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엄마의 몸과 분리되어 아무 접촉을 할 수 없었고,
엄마의 목소리나 엄마의 표정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젖을 먹일 때에도 아라페시 족은
앉아서 아기의 입에 젖꼭지가 잘 들어가도록 배려한 다음
아기가 젖을 먹는 동안 지속적으로 아기들을 토닥거려주며 관찰할 수 있었다.
반면 문두구머 족의 엄마들은 서서 한 쪽 팔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다보니
팔이 금세 아프게 마련이어서 얼른 젖을 떼고 다시 바구니에 아기를 넣었다.
이제 해답은 분명해진 것이다.
아라페시 족의 평화성과 문두구머 족의 폭력성의 차이는 바로 터치의 차이였다.
위 이야기는 티파니 필드의「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Touch」
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예수님의 습관 - 터치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상을 관찰해 보면
그분의 중요한 습관의 하나가 바로 이 ‘터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습관이었다.
주님은 특별히 사회적으로 터치가 금지된 문둥병자와 죽은 시체조차
금기를 깨고 터치하셨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터치하셨을까?
◑1. 치유의 터치
▲터치할 때 치유된다.
예수님에게서 터치는 치유의 거룩한 방편이었다.
그가 사람들을 터치할 때마다 사람들은 치유를 경험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제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보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녀를 고치실 때,
그 치유의 방법이 단순하게 터치였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터치)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마8:15
12년간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
그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로 흘러나가, 여인의 혈루병을 치유했다.
이 여인의 터치가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병자들이 동일한 터치로 치유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왜 터치의 사역이 필요한가?
주님이 이 땅에 계시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이웃들이 연약함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 나간 엄마의 공
앞서 소개한 티파니 필드의「터치」에 보면 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작은 도시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다.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도 좋았고 영양도 충분히 공급되었고,
강 건너 편 다른 고아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영양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이,
시설이 좋았던 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고아원보다
아이들의 발병률이나 사망률이 크게 낮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몇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전쟁 중인 어느 날, '시설 안 좋은 고아원'에
자기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엄마 한 명이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녀는 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자기 아이들로 착각하여
날마다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안아주고 쓰다듬어 준 것이
두 고아원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육체와 마음의 연약함에 시달리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주님의 터치인 것이다.
◑2. 두려움을 극복하는 터치
▲변화산의 두려움을 이기게 한 터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전혀 준비가 안 된 채로 변화산의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땅에 엎드려 진다. 마17:6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실존이다. (모든 사람이 경험한다는 뜻)
인간은 누구나 정서적으로 준비 없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인간의 의식 속에 소위 나름대로의 충격을 남기게 된다.
변화산상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면서(터치)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마17:7
그리고 그 두려움은 끝이었다.
사실 인생의 여정에는 얼마나 많은 두려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의 임재와 터치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아버님의 소천
지난 2월 27일 세상을 떠나신 저의 아버님의 별세 과정을 지켜보며
저(이동원 목사님)는 또 한번 터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가기 전, 두 달여간 아버님은 육체적으로 많이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러나 제 어머님과 아들들, 며느리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끊임없이 마사지하고 만져드렸다. 터치해 드렸다.
저희 아버님은, 무엇을 느끼고 계시느냐는 한 며느리의 질문에
뜻밖에도 “너무 황홀해!”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생각해 보시라,
암과 싸우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계신 분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이,
‘황홀하다!’였음을...
이것이 바로 터치의 위력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찬송가 470장을 들으시며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입관의 순간에 다시 대면한 아버님의 시신에는, 두려움은 흔적조차 없으셨다.
터치가 사망의 두려움을 소멸한 것이다.
저는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의 평생을 한번도 부럽다고 생각한 일이 없었던 제가
갑자기 나도 죽음의 길만은 가족들의 황홀한 터치를 경험하며
아버지처럼 가고 싶다는 감동이 저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터치 때문이었다.
◑3. 눈을 열게 하는 터치
성령의 터치가, 주님의 터치가 내 신앙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영안이 열리면 오직 예수만 보인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17:8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영혼의 눈을 뜨게 되자
오직 예수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예수만 소망인 삶을 산다.
이제는 예수가 생명이요, 진리인 삶을 산다.
예수가 모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예수님은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고치셨다.
그들이 눈을 떠서 본 가장 놀라운 분은, 그들을 눈뜨게 하신 예수였다.
예수가 보이자, 그들에게 보아야 할 다른 대상이 있을 수 없었다.
▲엠마오 길에서 눈이 열린 제자
이것이 엠마오 길의 두 제자의 경험이 아니었는가!
한순간 식탁에서 그들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24:31
그들은 주님 곁에서 함께 걸어가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주님이 부활하신 후 모습이 변화되셨기 때문이리다.
그런데 영안이 열리자, 바로 곁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영안이 열리면, 바로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목장(구역)은 터치하는 모임
우리 목장 교회는 우리들의 영혼이 터치하는 곳이다.
말씀과 기도, 또한 삶의 고통과 기쁨을 서로 나누며
서로의 영혼들이 터치되는 곳이다.
터치될 때,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아직 눈이 안 열리신 분은 마음을 열고 기다리시면 된다.
우리의 모임 중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마18:20
곧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며 다가오실 것이다.
▲예수는 ‘점점’ 보이게 된다.
예수님은 침을 바르며 묻던 맹인에게처럼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
우리 중 혹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직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일 뿐인데요...” 막8:24
그러나 한순간 당신도 마침내 소리치게 될 것이다.
“오 예, 예수가,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 분이 너무 확실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구원이라고 부른다.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눈이 열린 사람의 간증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찬405장 1절)
나는 한 때 길을 잃어버렸으나 이제 찾은바 되었고,
나는 한 때 맹인이었으나 이제 보게 되었도다!
눈이 열린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찬송이다.
눈이 열린 사람은, 이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이 넘친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3.11. *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터치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리빙 http://blog.daum.net/bible3/10964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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