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잠16:4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자기 목적대로 지으셨나니, 악인은 재앙의 날을 위해 만드셨다. 잠16:4
◑「수용소 군도」와 「콰이강의 다리」
솔제니친은 자신이 체험한 상황을 소설 「수용소 군도」를 통하여
당시의 소련의 현실을 서방세계에 고발하였습니다.
수용소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벽돌 나르기」였습니다.
노역하는 시간이 되면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벽돌을
다른 쪽 구석으로 옮겨 쌓아야 합니다.
다른 쪽 구석에 다 쌓아 놓으면
다시 원래 자리인 처음 자리에로 다시 옮겨 쌓아야 합니다.
옮겨 쌓고는 다시 또 제자리로 옮겨 쌓습니다.
그렇게 쉼 없이 하루 온종일 옮겨가며 쌓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미쳐 버릴 것입니다.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 무미건조함,
무의미한 짓거리를 아무런 의식도 없이 행해야 하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요,
무엇인가를 창조적으로 완성하는데 보람을 느끼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 「벽돌 나르기」를 고문 중의 가장 큰 고문이라 하였습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일본군에 포로가 된 영국군들은
일본군의 명에 의해 군사요충지인 콰이강에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비록 적군의 명에 의해 다리를 놓아야 했지만 영국군들은 열심히 다리를 놓습니다.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완성하고 다리 위로 차량과 전차가 지나갈 때
그들은 환호성을 올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하나의 다리를 건설한 것입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해 그 힘든 작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적이니 아군이니 하는 어휘는 소용이 없습니다.
단지 창조적인 일의 완성, 그것만이 영화 전편을 흐르고 있는 주된 정신입니다.
「벽돌 나르기」와 「콰이강의 다리」, 같은 벽돌이 모티브로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성공의 정의
'저는 항상 성공을 바라며 생활했습니다.
성공에 대해 제가 내린 정의는
첫째로, 세상에 뭔가 <공헌>하며 그 일을 하는 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성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자신이 뭔가 <가치 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이 두 가지 요소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자신의 일에 뭔가 의미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사, 전 CEO 노먼 오거스틴의 말입니다. 행복경영에서
◑고소득자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논문은
"평균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더 긴장되어 있고
특별히 즐길 만한 행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 고 결론지었습니다.
미국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을 위해 쏟는 시간이 더 적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감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거든요. 돈을 추구하다 보니까
시간도 환경도 돈벌이에 다 빼앗기고,
아내도 자식도 가족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항상 긴장 속에서 살고 스트레스 속에 살기 때문에,
돈은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업가는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인간관계로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삶 일뿐,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돈도 적당히 벌면서 삶의 의미를 깊이 찾아보는 사람만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의 의미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란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수 만년 동안 살아온 생활법칙에 도전을 합니다.
남들이 떼 지어 모여 노는 곳에 가지 않고
다들 떠들어대며 생선 머리를 쪼아 먹을 때 같이 주둥이를 내밀지 않고
언제나 홀로 더 멀리, 더 높이, 더 멋있게 날려고 연습을 합니다.
물론 조나단이 하는 일이
자신의 기본적으로 생존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나단은 오직 남들보다 다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은 딴 갈매기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통적 관습과 가치관에 도전하여
다른 갈매기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는 갈매기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잠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며
모든 집단 속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행동 통일을 합니다.
리차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은
바로 우리 인간의 생활양상을 일깨워 주는 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쉽게 편하게 사는 방법은
남이 날 때 자기도 날고, 남들이 떠들 때 자기도 떠들고
남이 짝을 찾아 날 때 자기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방법은 될 수 있으나
생존에 의미를 주는 삶의 방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생존의 의미가 없는 삶은... 살아있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의미란? 어떻게 살아남느냐? 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는 문제입니다.
생존의 의미를 발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멋지게 날아보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의미 없는 ‘수’는 없다. *手:바둑의 한 수, 두 수
프로 바둑기사가 바둑 한 판을 두는 데에는 보통 4백수 정도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프로기사들은 의미가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가 있는 돌만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 하지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 의미 없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미 없이 바둑을 두시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함부로 경영하지 않으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고수는, 자기 삶의 모든 희노애락 가운데, ‘의미’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수를, 부족하나마 읽어나갑니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갑갑하고, 안타깝고, 지루하고, 원망까지 합니다...
여러분, 오늘 갑갑하고 답답하십니까?
아마도 아직 당신은 ‘하나님의 수, 하나님의 손길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무슨 큰 대박이 나고, 환경이 확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섭리,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의 의미를
점점 발견하고 깨달아가고, 점점 수긍해간다는 것입니다. (이상 모두 펀 글)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 http://blog.daum.net/bible3/1315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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