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 다오 마1:21 Max Lucado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1:21
▲당시 흔한 이름 ‘예수’
‘예수’는 복음서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어진 예수님의 명칭이다.
복음서에 거의 6백번 가량이나 사용되었다. ‘나사렛 예수’ 포함.
반면에 존칭인 ‘주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은
(아마 복음서에) 겨우 6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당시에 ‘예수’는 유대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의 하나였다.
가장 존경 받는 구약의 영웅 여호수아가 헬라어로 ‘예수’였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들도 최소한 5명은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20명이나 나온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라는 이름이 흔하게 등장한다.
바울의 친구 중에 ‘유스도라 하는 예수’가 있었으며 골4:11
바보라는 도시의 마술사 이름은 바예수였다. 행13:6
어떤 성경 사본에는 강도 바라바의 원래 이름이 예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예수 바라바냐, 아니면 메시아라는 예수냐?”
▲흔한 이름 ‘예수’에 대한 묵상 - 높으신 하나님이 너무 평범하셨다.
흔한 이름 ‘예수’는, 오늘날 흔한 사람 ‘(김)유신’ 일수도 있다.
만약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의 이름은 존, 밥, 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오늘 여기에 계신다면,
‘고귀하시고 거룩하신 천상의 하나님 3세’와 같은 고상한 이름으로
자기를 높여서, 그렇지 못한 일반 사람들과 거리를 두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지으실 때,
인간의 이름을 선택하셨다. 마1:21
즉, 학교 출석부에 두세 번 나올 만한 그런 흔한 이름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그 분은 너무나 평범하셨다.
만약 그가 오늘 여기에 계신다면, 수많은 쇼핑 인파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코 입고 있는 옷이나, 지니고 다니는 명함(직함),
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보석 따위를 몸에 붙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분은 처음만나는 사람과 악수하시며 그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저는 예수입니다!”
(아무개 박사, 교수 아님. 가장 겸손한 자기소개 방식,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의 직함이 아닌, 서로의 이름을 부르나요?)
▲오늘 우리 가운데, 자기가 너무 평범해서 괴롭다는 사람도 있다.
인지도 높은 책도 한 권 펴내지 못했기에...
박사 가운 한 번 입어보지 못했기에...
많은 군중을 거느린 대제사장이 되어보지 못했기에 괴롭다는 사람들...
(그런 것도 있으면 좋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 평범한 예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면서도,
로마의 하찮은 군인들이 그의 손에 못 박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순결을 요구하면서도,
회개한 매춘부의 권익을 옹호했다. (높은 지체분께는 위신 떨어지는 일)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하면서도,
그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거절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면서도,
이 세상에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것도 냄새가 진동해 사람들이 가기 꺼리는 마구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책은 한 권도 쓰거나 출판하신 적이 없었고,
무슨 본부 건물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는 우주의 창조주로 여김을 받으려 하면서도,
호화로운 왕궁에 살지도 않았고, 많은 시녀나 대신들을 거느리지도 않으셨다.
그는 가장 고상하고 고결한 신앙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범죄인으로 몰려서 형틀에서 사형을 당했다.
고관대작의 아들이었다면, 그런 형벌은 피해 갔을 것이다.
오늘 내 주변에 여러 보통 사람 '예수'가 계심을 인하여 감사드린다.
오늘 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가 되기를 바란다.
대제사장, 총독은 어렵지만 보통 사람 '예수'는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거리감이 없으신 예수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하셨을 때, 놀랍게도 인간의 몸을 통해 하셨다.
죽은 사람을 일어나라고 부르셨던 그 혀는... 인간의 혀였다. 평범한 예수의 혀!
문둥병자를 만지셨던 그분의 손은... 보통 사람처럼 손톱이 지저분했을 수 있다.
한 여자가 감싸 안고 울었던 그의 발은... 아마 먼지투성이었을 것이다.
그 분의 눈물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나 쉽게 남들 보는데서 눈물 흘린다.
고관대작은 품위 유지하느라 눈물도 쉽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 분이 갈릴리에서, 유대 광야에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는
보통 사람, 평범한 예수로서 나아가셨다. 그것이 그분의 자원하신 선택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는 암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그가 얼마나 평범한 예수였던지,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를 시기하고, 그를 오해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너무 신성, 거룩, 존경스러워...
감히 만질 수 없는 분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서 그 분께 나아가기를 꺼려했던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기억하시라, 거리감을 두는 것은 인간이다.
예수에게는 아무에게도 거리감이 없으셨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 다오!” ▣ 크리스천 인격
*출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God Came Near, 맥스 루케이도 pp.69-74. 읽고서 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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