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관한 최후의 말씀 계19, 20장
유진 피터슨「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Reversed Thunder pp.219~237. 요약
▲지금까지 사도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할 때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예배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 1장
*편지의 수신자들인 <7교회>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고 : 2~3장
*성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예배>에 대해 가르치고 : 4~5장
*지금 만연하는 세상의 <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가르치고 : 6~7장 (7인)
*그 악을 이기려면 성도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 8~9장 (7나팔)
*그리고 <전도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고 : 10~11장 (두 증인)
*지금 성도들을 핍박하는<로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 12~14장(용과 짐승)
*그 로마는 결국 <심판>받을 것임을 가르친다. : 15~18장 (7대접, 음녀, 바벨론)
*그리고 성도들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다. : 19~20장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가져야할 올바른 <새하늘과 새땅>의 신앙에 대해 설교한다.
(21~22장)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의 양면적 해석 (편집자의 소견임)
사도요한은 계시록을 1세기 당시 성도들을 위해 쓴 것은 당연하다. (과거주의 해석)
그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위 책도 계시록을 '과거주의 관점'에서 탁월하게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성격이 있다.
그래서 계시록은 21세기 현재에도 적용되고,
또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적용될 것이다. (미래주의 해석)
그래서 저(편집자)는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적 해석을 동시에 모두 포용한다.
사도요한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어떤 신비한 계시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자기 시대에 받은 계시와 메시지가
신비하게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몰랐다 할지라도, 그에게 계시를 주실 때 주님은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미래적인) 계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첫째 환상 - 어린양의 혼인잔치 19:1~10
로마의 핍박 가운데, 오랜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구원에 대해, 요한은 묵시문학적 기법으로,
<성도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자세한 내용과 해석은
오른편 설교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rfcdrfcd/14695626
◑구원의 둘째 환상 - 전쟁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 19:11~21
이제까지 성경에 표현된 그리스도는, ‘양’으로 대표되는
겸손하고, 가난하고, 온유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그런 ‘연약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용사>이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19:11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9:14
▲두 짐승의 패배
계13장에서, 성도들을 괴롭히던 두 짐승이 (or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패하여 유황 불못 속으로 들어간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19:20
▲용(사탄)의 패배
계12장에서 아기와 어머니를 괴롭히는 용(사탄) 역시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께 패하여
불못 속으로 던져진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0
▲사도 바울의 영적 전쟁
바울이 지중해 연안에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이런 영적 실체들과의 전쟁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실제로 수행해야 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영적 실체들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면서
‘권세’ 롬8:38 또는 ‘하늘의 권세자’
‘이 시대의 통치자’ 고전2:8 또는 ‘이 시대의 관원’
‘보좌’ 골1:16
‘주관하는 자’ 엡1:21
‘우리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 권세...’ 엡6:12 (그 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음)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 항상 깨어있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바울은,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이미 승리했음을 늘 상기하며 가르쳤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2:15 등
밝히 드러내다 -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 때, 포로로,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싸움에 임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가장 안전한 장소는 전쟁터이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가 백마를 타고 활약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 우리가 치르는 영적전쟁을 -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해한다.
이런 자기가 싸워야 ‘아마겟돈 전쟁’은 외면하고,
남의 나라에서 남들이 싸울 ‘아마겟돈 전쟁’을 운운하는 것은(문자적/미래적 해석)
<자기 책임 회피요, 미혹을 받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계시록의 문자적 해석을 배격한다.
사실 이런 계시록의 문자적 해석이 오버하면 ‘기독교 근본주의’로 발전해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의 성경적 근거로 오해될 수도 있다.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을 ‘하나님의 예언 성취’로 오해하는 것이다.)
*관련 글 보기 : http://blog.daum.net/rfcdrfcd/13180609
▲구원은 영적 전쟁이다.
구원 사역은, 백마를 타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용과 두 짐승(또는 짐승과 거짓선지자)을 대항해서 싸우는 영적 전쟁이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전쟁이다. 그러나 승리는 예정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 피터슨 박사는
‘세 개구리’(16:13~14)를 ‘용과 두 짐승’의 변형적 이미지로 해석한다.
‘용과 짐승’은, 성도들을 당장 잡아먹을 듯한 무시무시한 야수의 이미지이지만,
사실은 ‘세 개구리’처럼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구원의 셋째 (묵시적) 환상 - 천년왕국 계20:1~10
관련 글 보기 http://blog.daum.net/rfcdrfcd/10562136
◑구원의 넷째 (묵시적) 환상 - 백보좌 심판 계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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