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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치욕 vs 애굽의 보화

LNCK 2008. 7. 2. 23:15

◈그리스도의 치욕 vs 애굽의 보화   히11:26    2007년 3월 설교녹취


 

아래 녹취한 설교문은, 평소에 우리가 듣던 설교들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비판적(반론적) 관점으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서, 참된 기독교의 본질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면 세상에 복음을 수출하고 선교할 나라가... 복음의 본질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예표 모세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지위’를 거절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표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아들의 ‘지위’를 거절하시고,

천국의 모든 ‘부귀영화’를 거절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치를 기꺼이 당하신 예표를... 모세가 보여주었다.

 

이 길은, 모세와 그리스도만 걸어가시고,

우리는 그 혜택을 무임승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거기에 ‘진정한 영광’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모세가 거절하고 버렸던 것들을... 도리어 애써 쫓아가고,

모세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수치’를... 가급적 애써 배척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은 아닌지..?

 

 

◑기복주의 신앙 해부

 

▲모세가 거절한 것들을 환영하는 신자들

믿음으로 모세가 거절하고 버린 것들은,

보통 세상 사람들에겐 ‘꿈’이요, ‘목표’였다.

피 땀 흘려 공부하고 일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모세가 거절하고 버린 것들을 획득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한 자기 자녀들까지 그 길로 몰아간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기도 또는 믿음(긍정, 자기계발, 마인드 컨트롤)의 힘을 빌려서

모세가 거절하고 버리고 포기했던 것들을... 얻고자 발버둥 친다.

하나님께 이런 것들을 주십사고 새벽에도 교회가고, 철야기도, 산기도를 드린다.

(새벽기도, 철야기도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님)

 

모세처럼 ‘그리스도의 치욕,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자 모세’와 같이 되려고 한다.

 

샤머니즘, 기복주의는

기도, 교회봉사, 헌금 등을 통해서

모세가 버리고 거절했던 것들을

얻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미숙한)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불신자와 큰 차이가 없다.

얻고자 하는 꿈과 목표, 야망, 욕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서로 같다.

다만 방법론적으로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불신자들은 그런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서..,자기 힘, 지혜, 수단, 방법을 총동원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동일한 목표를 위해서.., 기도, 헌금, 교회봉사, 믿음을 동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자기가 강력히 바라면 얻게 된다는 자기 암시)

 

이렇게 기복주의적 기독교는 모세가 버린 것들을 도로 주워 담고 얻는 것이

신앙의 승리고, 간증이고, 하나님의 영광이고, 주님이 주신 복으로 여긴다.

그것을 얻고 나면 ‘내가 믿어서 이렇게 되었다’며 자기 믿음을 또한 자랑한다.

이렇게 승진도 하고, 돈도 잘 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한다.

 

거기엔 남들은 잘 못 믿어서... 승진도 못하고, 돈도 못 버는데,

나는 남들보다 잘 믿어서... 이렇게 승진도 하고, 돈도 잘 번다는 교만이 깔려있다.

더 나아가 ‘너희도 나처럼 믿어서 이렇게 얻으라’고 자랑한다.

 

결국 기복신앙과 불신자는 목표와 방향이 서로 같다.

단지 수단과 방법이 약간 다를 뿐이다.

자기 힘을 총동원 하는 것은... 불신자이고,

주님 힘을 빌리는 것이... 기복주의자다.

 

▲내 ‘믿음’의 목표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지위, 권력, 부귀영화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믿음으로 모세는 도리어 그런 것들을 거절, 포기, 버렸다.

믿음으로 모세가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치욕이었다.        히11:26

 

믿음으로 모세가 얻고자 했던 것은, 이집트의 보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었다.                               히11:26     

 

모세의 관심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 지위, 권세, 인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었고,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는 ‘그리스도의 치욕’에 동참함 이었다.

 

만약에 모세가, 지금 기복주의자들이 얻기 원하는 것들을 얻으려 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파라오의 왕궁에 남아서.. 권력투쟁을 했어야 했다.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파라오에게 잘 보여서... 권력승계를 이루어야 했다.

 

▲‘성공’이 믿음의 목표가 아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성실히 산 결과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것을 자기 일생의 목표로 산 것은 아니었다.

(결과와 목표를 구분해야 한다.)

다니엘 역시 믿음으로 산 결과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지,

바벨론의 총리가 되는 목표로, 기도하고 자기 믿음을 발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지위와 부귀를 얻기 위해서

기도를 남달리 열심히 하거나, 자기 믿음을 뜨겁게 한 것은 아니었다.

믿음의 결과로 그런 권세가 주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이다.

 

내가 떠야 하나님께 영광이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위 관리가 되고, 재벌이 되고

소위 ‘내가 떠야 주님이 뜨신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성경에 그런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은 없다. 물론 권장하는 법도 없다.

 

핵심은, 삶의 방향과 목표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잘못이다.

쉽게 말해서 그런 것들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믿음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축복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을 믿음의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그 목표 때문에 남달리 주님께 기도하고 교회봉사 한다면... ‘기복주의’이다.

우리는 믿음의 <목표>와 <결과>를 잘 구분해야 한다.

 

(과거에 성도들의 교회봉사를 유도하기 위해, 이런 신앙이 유포되는 것을 묵인했다.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면,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된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다) 

관련 글: 내가 떠야...

 

  

◑이집트의 보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히11:26  

 

이집트는 당시에 세계 최대 문명국이었고, 그 보화 역시 세계 최대였다.

거기에는 나일강의 비옥한 삼각주에서 얻는 풍부하고 넉넉한 농산물이 있었다.

또한 강과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풍부한 수산물이 있었다.

 

채소나 과일이 얼마나 풍족했든지, 광야에서 불평한 히브리 사람들의 불평을 보면

적어도 애굽에서는 먹거리 걱정은 안 하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민11:5

노예생활을 하면서 노동으로 고생했어도, 음식만큼은 넉넉하게 먹었던 모양이다.

 

출16:3에, 우리가 고기솥 옆에 앉아 있었을 때, 배불리 먹던 빵 옆에 앉아 있었을 때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한탄하고 있다.

이집트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넉넉했든지, 노예들조차 고기와 빵과 채소를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집트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더라면,

광야에서 고기와 야채를 못 먹는다고...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으니까.

이집트로 돌아가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 그 곳에 뭐하러 돌아가려 했겠는가?

 

노예가 그 정도였다면, 모세가 왕자로서 누렸을

부와 지위와 쾌락과 권세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바로 ‘이집트의 보화’였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경제적 풍요 역시 ‘이집트의 보화’로 볼 수 있다.

거기는 비록 물질적 부요뿐만 아닐, 수학, 과학, 점성술 등이 발달해 있었다.

언어, 문자를 포함한 문화적으로도 당시 세계 최고였다.

 

거기에다 각종 우상들이 넘치는 ‘종교적 선진국’이었다.

애굽의 왕자 모세는, 정말 세상에서 몇 안 되는 복덩어리였다. 만복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잠간’ 누리는 부귀와 영화였다.

히11:25

영원한 영광, 참된 기쁨과 만족은... ‘이집트의 모든 보화’에 없었다.

참된 생명과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었다. ‘이집트의 보화’에 없었다.

 

거기엔 세상의 모든 보물, 보석, 진기한 특산품과 예술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없었다.

 

이집트가 자랑하는 거대한 건축물, 피라미드에는

방부처리한 시신 미라만 있지,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이집트의 보화’의 한계요, 약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모세는 ‘이집트의 보화’보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 히11:26

재물을 평가하는 가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성경에 육신의 모든 영화는... 시들어가는 풀의 꽃, 마른 풀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주님은,

세상 모든 왕국의 영광과 보화를 다 준다고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것들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오늘 우리도 거절하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오는 것을 거절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을 억지로 쟁취하려고 발버둥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일언지하에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셨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왕국의 보화보다 더 크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보화’는 아무리 가치 있어도, 육신과 함께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성도들이 ‘이집트의 보화’에 관심을 가질 때, 믿음은 파산하기 쉽다.

 

▲‘이집트의 보화’는 오늘날 성경적 표현으로 ‘세상’이다.

모세가 ‘이집트의 보화’에 대해 가졌던 자세를,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한다.

 

위에 있는 것들에 생각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골3:2 

 

모세는 ‘이집트의 보화’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 신앙의 방향이다.

 

▲신약에서 이런 가치관을 제일 잘 보여준 사람은 ‘바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7~9

 

그는 바리새인의 지위, 가말리엘의 학벌...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로 버렸다.

그리스도를 위한 ‘해害’ 즉 손실로 여겼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바울이 똥으로 여긴 것들을 얻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봉사 피나게 하고, 적극적인 믿음 까지 동원한다.

 

▲그런 사람은 ‘탐심의 소유자’이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다.

육신적인 신자들은, 모세와 바울이 버렸던 것들을... 아까워서 주워 담고 있다.

그런 것들을 하나라도 받아야, 은혜요, 승리인줄 알고, 자랑까지 한다.

그게 간증이라고 간증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가 세상에 대해 또한 못 박혔다고 말한다. 갈6:1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요일2:15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적 가치관에 일치, 동화되지 말고, 그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세상 가치관에 대한 명령이요, 교훈이다.

 

 

◑그리스도의 치욕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히11:26  

 

▲‘그리스도의 치욕’을 받으면, 복음을 전할 때 받는 핍박으로서

오히려 성령이 충만해지고, 기쁨이 충만해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으셨던 수치와 비난이다.

모세는 십자가 사건 1천5백 년 전에, 그 수치에 동참했고,

오늘날 우리도 그 수치에 동참할 수 있다. 

단,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때만, 가능하다. 둘 다 취하지는 못한다.

 

▲다윗도 주를 위해 (그리스도의) 치욕을 덮어썼다. 시69:7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의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졌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영문 밖에 있는 그 분께로 나아가자 히13:13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는 일은...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설교는 ‘애굽의 보화’와 ‘그리스도의 치욕’을 대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애굽의 보화’를 짊어지는 것을 본질이라고 착각한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수치’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히11:26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5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택하지 않고, 애굽의 보화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 ‘그리스도의 고난/치욕’을 자발적으로 당할 것을 권고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3 

 

모세의 관심은 애굽의 보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상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택했다.

 

▲마치는 말: 방향이 중요하다.

이쪽을 보고 걸으면, 이쪽으로 가게 되고, 저쪽을 보고 걸으면, 저쪽으로 간다.

방향에 따라 자기 삶과 행동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관심이 이 땅의 명예, 부귀, 영광, 인기에 너무 연련하면 안 된다.

모세와 같이,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영광의 보상에 있기를 바란다.

 

<인터넷 설교 녹취, 2007년 3월 설교  *원제목 : 그리스도의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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