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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두 모습 히13:16 인터넷설교 스크랩
▲예수님께서는 크게 두 모습으로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첫째는「말씀의 사역자들」(마10:40,41절)
즉 오늘날의 목사나 전도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고,
둘째는「약자 및 가난한 자들」(마25:31-46절)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첫째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주의 종(목회자)들을 잘 섬기는 것만이 예수님을 섬기는 길이요,
축복의 전부인 줄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물론 확실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난하고 약한 자들과도 동일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종’들을 잘 섬기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
또한 ‘가난한 자들과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 역시 축복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주의 종들을 섬기는 것만을 축복받는 조건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는 확실한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종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아울러 하나님과 예수님이 관심을 갖고 돌보신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을 우리는 또한 사랑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의 불균형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를 신앙의 핵심으로 알고 믿습니다.
이제껏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최고인 줄로만 알아 왔습니다.
이런 진리는 ‘신본주의’이며, 따라서 이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들었고,
또한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물론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12:28-3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22:40, 롬13:8-10, 약2:8절
‘이웃 사랑’이 빠진 ‘신본주의’는 <불균형>이라는 뜻입니다.
▲기복주의적 신본주의
오늘날 교회는 입술로는 이웃 사랑을 부르짖고 있기는 합니다만,
실제의 삶 속에서 이 명령은 별로 실효적이지 못합니다.
누구 말대로 ‘남에게 보이려고’ (구제 안 한다는) 궁색함을 모면하는 수준에서
겨우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 주님 섬기는 길이요, 복 받는 길’이란 생각이 강조된 반면
‘이웃을 섬기는 길’은 흐지부지한 가운데, 성경적 균형을 잃었다고 봅니다.
이런 의식은, 자연히 축복, 그것도 주로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하는
이기주의적 기복 신앙과 결부되어 한국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잘 믿는 것=주의 종 잘 섬기는 것=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강조되었는데,
거기서 ‘이웃을 돌보는 것’이란 요소가 빠져서 성경적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설교하고, 또한 배웠던 것입니다.
문제는 한쪽만을 중요시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 대한 이웃 사랑과 같은 중요한 계명을
도외시 하는데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구제’의 구절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절묘하게 그런 구절을 제치고, 비껴나가고, 수비벽을 뚫고 나가서,
‘오직 주의 종 섬기고, 교회 섬기고’만 편파적으로 강조한다면,
아무리 ‘성장 일변도’ 정책으로 모두가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을 호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르반과 흡사
바로 이러한 사고 방식은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유대인들의 그릇된 관행인
「고르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막7:8~11
즉 그들은 부모에게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대치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잘 섬기면
그것으로 부모를 포함한 이웃에 대한 의무가 대치될 수 있다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꼬박꼬박 바치면서도
연로한 부모님께 '백일조' 드리기도 아까워하는 분들은... 더 온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과 ‘이웃 사랑’의 괴리
이런 이유로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이 신앙생활에 있어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오히려 이웃과의 관계, 즉 약하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
자칫 인본주의자로 몰리면서 "좋지 못한" 믿음의 소유자로 취급받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로 인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면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모두를 동시에 사랑하고 섬기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말씀의 일부만 지키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웃도 사랑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약하고 가난한 소자와도 같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요일3:16-18
바울도 그러므로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고하였고 갈6:10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히13:16
*이런 글을 읽고서, 남을 비판하면 크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그냥 나 스스로 더 잘 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08.04.13.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편집
▶관련 글 : 어떤 영국 평신도 자매님이
“구제”에 관한 성경구절을 뽑아 놓으신 것을 인터넷에서 발견했습니다.
▶관련 글 : 프란시스의 가난 이해
▶관련 글 : 세상에 가난한 자를 두신 목적▶관련 글 : 세상에 가난한 자를 두신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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