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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에 대하여

LNCK 2008. 8. 15. 21:41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에 대하여                   -블로그 스크랩-

 

 

(많은 분들이, 천주교가 성상숭배 등 우상숭배 한다고 이질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맘몬을 우상숭배 하듯 떠받드는 것과 비교할 때

과연 예수님은 어느 것을 더 심각하게 여기실런지요?)

 

 

혹자는 기독교 신앙을 주로 <외형적, 이 세상에서 잘 됨>으로 추구하지만,

혹자는 기독교 신앙을 주로 <내면적, 주님과 인격적 만남>으로 추구합니다.

어느 쪽이 더 신앙의 본질에 가까울까요?

아래 글은, 내면적, 인격적으로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라도, 그 깊이가 각각 다르다.

우리 인간관계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TV 뉴스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어떤 사람이나 연예인 등은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물론,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저 한두 번 인사한 옆집에 사는 사람이나,

매일 인사만 하고 지나친 아파트 경비아저씨 등과 같이

그저 서로 아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인격적인 관계라 하면, 함께 식사도 하고,

상대방의 기쁨과 어려움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상대방의 취미나 성향 등을 알아가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각 사람들마다 우리가 갖는 인격적인 깊이는 서로 다를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 인격적 관계로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시간 미사만 참석하고 끝내버린다면,

어쩌면 우린 그저 예식을 함께 행하는, 그저그런 사이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 예수님은 그저 멀찍이 아는 사람일 뿐,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 형성이 필요하다.

그분과 함께 생활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그분의 기쁨과 고통, 그리고 비전을 함께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런 만남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기에,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다.

우리와 같은 따뜻한 심장을 가지셨기에

우리와 함께 느끼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예배, 성경 읽기, 기도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반드시 인격적 교제가 있어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더할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피정(避靜, 리트릿, 기도원)을 다녀온 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자신을 본다.

그것은 피정기간 내내 기도를 통해 그분과의 관계가 풍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

그분을 더욱 알아가고 그분의 마음을 느끼며

그분의 비전과 기쁨 그리고 고통을 함께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예배 드림과 성서묵상, 성서관상 및 기도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을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갈 수 있다.

성서는 단지 율법서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We do not believe in something, but in someone.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not performance)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사랑이 가득한 기도, 바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담긴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우리가 (아무 말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주님의 현존 그 자체만을 느끼는 기도도...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


 

▲깊은 인격적 관계의 결과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

함께 살지도, 말씀을 직접 듣지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시대와 장소가 달랐던 성자들이

일평생 주님을 위해 남달리 고결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순교자들은 어떻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분(예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께 그 도우심을 청해야만 한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친밀한 만남에 대하여                  -블로그 스크랩-


 

예수님은 내게 ‘절대선’이나 ‘보편적 윤리관’이 아니라

마치 내 친한 친구, 내 직장상사처럼 <진짜 실제적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내 기도는 정말 인격적 만남인가? 

얼마 전 나는 종교와 관련된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제는, 영화에서,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는 참담한 과정을

겪으면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한 장면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영화 속의 그 사제야말로 참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기도를 드리던 그 사제의 모습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기도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과연 나는 기도를 통해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있는가?>


 

▲인격적 만남에 관한 깊은 자기성찰

사실 내가 가까운 친구에게나 연인에게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다면,

다시 그런 실수를 하여 친구에게 또 다시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 친구를 만나면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더욱 잘해주려 할 것이다.


이것은 또 회사에서 업무에 대한 중대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

직장상사에게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죄를 짓고도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기도를 드린 후에

또 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다가

또다시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친구나 직장상사만도 못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어떤 철학개념의 <절대선 絶對善>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인간의 그저 <보편적인 윤리관, 가치관>에 따라

나 스스로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선>이라는 석고상을 향해 죄의 용서를 청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형태의 우상으로서…

(나는 예수와 인격적 관계라 여기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그게 아닐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친구나 가까운 연인 그리고 직장상사와의 관계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격적인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인격적인 교류가 없는 탓일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현존의식에 대한 결핍이다.

친구나 직장상사의 현존은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하고 있지만,

주님의 현존은 그러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한 인격으로 느끼며

기도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기도를 통해 그 분의 숨소리, 체온

그리고 그분의 표정과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주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

그것은 가까운 친구의 현존을 구체적인 내 현실 안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친구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나 친구와 함께 하는 대화와 같은 것이다.


즉, 기도를 통해 인간적인 감정을 그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급격한 자기 변화를 했던 사람들도 바로 이렇듯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고백성사 후 쉽게 다시 죄짓는 것도, 우리의 나약한 본성도 있지만,

이러한 주님의 현존의식에 대한 결핍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자.

과연 보고픈 친구를 그리워하듯이 그분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특별히,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나는 얼마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는가?

참으로 내 대신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한 친구의 죽음으로 느끼고 있는가?

그 분의 어깨에서, 머리에서, 그리고 손발에서 흘리는 그 핏방울을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복음을 관상하면서 예수님의 표정,

그분의 목소리, 그리고 땀 냄새까지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현존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이며,

이러한 현존의식을 통해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주님의 현존의식presence을 느끼면서,

구체적으로 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듯 기도를 하는 것이다.

즉, 그분의 현존에 대한 확신과 바로 내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다 생각하며

그분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일상의 친밀이 기도의 친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만남은

일상에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나의 삶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기도 역시 친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우리의 부단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가 들은 것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면화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 마음을 열어 기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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