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키웁시다 벧후1:5~11 설교 스크랩
◑성경은 <참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죽습니다.
쥐를 독 안에 넣고 완전히 봉해서 깜깜하게 만들면,
그 쥐가 독 안에서 몇 분이나 살아 있을 것 같습니까?
아주 건강한 쥐를 집어넣고 여러 차례 실험을 해서 얻은 평균치가 3분이랍니다.
공기가 안 통해서 질식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3분간 살아 있다가, 어둠속에서 절망해서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독 속에 쥐를 집어넣고, 바늘 구멍만한 구멍을 뚫어 빛을 넣어주면
그 속에 있는 쥐는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36시간을 버틴답니다.
분으로 환산하면 2,160분이고, 3분의 720배나 됩니다.
이 실험은, 체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졌을 때
그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실낱같은 빛이라도 보면서 희망을 발견한 쥐는
무려 720배나 그 똑같은 환경을 잘 극복해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위의 쥐 실험과 비슷한 결과가 나온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회사에서 냉동트럭을 운행하다가 한 사람이 그만 실수로
냉동트럭의 냉동실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냉동장치가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안에 갇힌 사람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희망을 가져야 살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희망>을 가집니다.
<돈>을 최고의 희망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돈이 없어지거나 큰 손실을 입으면.. 병이 나고, 죽기도 합니다.
<출세>를 인생의 최대의 꿈으로 생각하고 살던 사람은
출세하지 못하거나 퇴출을 당하면..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인생의 최고의 야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게 되면..
역시 좌절하고 절망하고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진정한 희망일까요?
무엇이 사람을 정말 강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들고,
평화 가운데 거하게 하는 진정한 희망은 무엇일까요?
▲성경(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 희망>을 줍니다. <참 희망>으로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이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초대교회 핍박 환경’을 잘 견뎠던 사람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평강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참 희망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붙들어야 할 가장 큰 소망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잘 풀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이 보배로운 믿음 위에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이 7가지를 공급 받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 환경을 바꾸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희망을 내 인생에 가장 큰 꿈으로 삼고 산다면
어떤 환경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갖기 위한 베드로의 권면
세상에 쉬운 것이 믿음 인 것 같지만, 세상에 어려운 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1. 믿음에 덕을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데
뒤에 있는 지식을 잘 공급받으면 덕을 공급받을 수 있고,
그 다음에 있는 절제를 잘 공급받으면 지식을 공급받을 수 있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화살표 방향이 ←)
덕은 ‘인격적 탁월함’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런 덕이 있으면, (‘완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가 바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인데,
그렇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2. 덕에 지식을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까지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설교 보기 여기 클릭-
▲3. 지식에 절제를
지식에 절제를 공급하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하나님하고 친해지려면(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려면)
절제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가정생활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이해됩니다.
아빠들의 경우에 늘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고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면 모르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있어야 하고
특히 남자애들에게는 아빠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하고 친해지려고 하면 어찌해야 됩니까? 시간 내야 됩니다.
시간을 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를 함께 하고,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 친밀해지는(지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빠들이 시간이 펑펑 남아돕니까?
바쁘게 살면서 시간을 쪼개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절제해야 되고,
이런저런 자기 생활을 절제해야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은 기본이고, 자기 감정, 자기중심적 생각 등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과 어울릴 수 있고, 그래야 자녀들을 알게 되고, 친밀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할일 다 하고, 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그 후에 짬나면 하나님 한번 봅시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평생 해봐야.. 하나님과 전혀 친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 와서 듣고, 계속 시간이 지나 목장 모임에도 한 번씩 가보고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머릿속에 좀 쌓이는데
하나님하고 친해지지 않습니다.
왜요? 절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뭘 절제해야 할 것인가는 잘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저를 보고 골프 좀 절제하라면, 전 골프 안 하니까 절제할 필요 없습니다.
연속극을 좀 절제하시오! 아, 저도 연속극 보는 것은 좋아합니다만,
볼 시간이 없어서 거의 못 보니까 그것도 별로 절제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아내로부터 제가 늘 듣는 소리는
‘일을 좀 절제하고, 사람 만나는 것 좀 절제하라’는 겁니다.
그런 얘기 나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해 들어 대오각성하고 세운 계획이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책 읽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한다.’ 입니다.
이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 하는 이유는
무언가 절제해서 시간을 만들면, 하나님하고 좀 더 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벌써 1월이 반 이상이 지나가 버렸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바빠서 성경 한번 제대로 깊이 있게 읽어볼 시간도 없고,
목장에 가서 서로 나눔 한번 나눌 수 없고,
바빠서 훈련 한번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다면.. 절제하셔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분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절제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하고 시간도 좀 가져야 되고,
부부가 대화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리고 하나님하고의 교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4. 절제에 인내를 공급하라고 합니다.
왜 절제하는 데 인내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절제해야 될 대상은 대개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싫어하는 것은 절제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저절로 안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가끔씩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좀 과부화가 걸렸다 싶으면.. 머릿속에서 삐삐삐 하고 두통이 나게 한다든지,
죄를 보면.. 메스껍고, 보기도 싫고,
하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 같으면.. 제동장치 같은 것이 켜지고 하는
그런 장치 같은 것이 있어서 작동하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짐승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물론 짐승들은 자기 유전인자 속에 입력된 DNA를 따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삽니다.
그래서 과식도 안 하고, 과로도 안 합니다. 그들에게 위장병, 과로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삐삐삐’ 하는 기계경보장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라는 인격적 장치)를 주셨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교회에서 술을 끊은 많은 분들을 접했는데,
남자들 중에서 믿음이 좀 자라자
‘건강에도 문제가 있고, 하나님도 술 마시는 것 별로 기뻐하지 않으시니까
술을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술맛이 소태 같아서 술 끊는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전히 술이 꿀맛인데도 불구하고 끊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해도 술맛은 변하지 않고,
감미로운 설교를 듣고 똑바로 살아야지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술은 여전히 단 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내를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인내(라는 인격적 장치)로, 그것을 자신이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인격적 장치를 주신 것입니다. 훨신 우대입니다)
즉 여기서 ‘인내’는 어떤 일을 계속 하는 것을 뜻함으로 여겨집니다.
뭘 꾹 참고 견디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두 번에 끝내지 않고, ‘절제’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5. 인내에 경건을 공급하라
인내에 왜 경건을 공급하라고 할까요? 여러분, 누가 인내를 잘 할 수 있을까요?
혹독한 훈련을 겪어낸 공수부대 출신이 인내를 잘 할까요?
그러나 세상이 공수부대 훈련 가지고 다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직장을 다니면서 먹으면 안 되는 검은 봉투가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걸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결정을 하는데
공수부대 훈련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이미 장가를 갔는데, 사무실에 예쁜 여직원이 있어, 그 여자를 유혹해 볼까 말까
갈등이 되는데, 그때 공수부대 훈련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인내에 경건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신전의식Coram Deo을 가지고 사는 경건한 사람이.. 잘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6. 경건에 형제 우애를 공급하라
여러분, ‘경건에 형제 우애를 공급하라’는 말씀은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가 아닌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게 경건과 바로 직결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는 꼴을 보면 ‘형제 우애’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떼어놓고 경건을 생각하면,
그건 길을 잘못 가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한 사랑입니다. 맞붙어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태도를 갖는 사람이라면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 친절
이런 것으로부터 경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한번 해볼까요?
지난 1주일 동안 QT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새벽기도 하루도 안 빠지고 했습니까? ... 이런 질문은 아닙니다.
물론 경건한 사람은 QT하고, 예배드리고, 가정예배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그런 분들일 가능성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거 한다고 해서 경건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난 1주일 동안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 때문에
그 사람과 밥 같이 먹어본 적 있습니까?
그 사람 손잡고 격려의 말을 한번 던져본 적 있습니까?
혹 만나지는 못해도 전화로 그 사람을 격려하고
함께 말을 나눠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제가 드리는 경건을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1년 전 것 생각하면 있는데 지난 1주일은 바빠 가지고 아무것도 못했어.’
그러면 당신은 경건하고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은 그렇게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경건에 형제우애를 공급하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여기서 ‘형제’라고 하는 단어는 사실은 믿음의 형제, 자매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7.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형제우애를 잘하려면, 사랑이 공급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하나님과 사랑의 교감이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끓어오릅니다. 넘쳐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우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우애합니다.
형제우애 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인내할 수 있고,
인내하는 사람이 절제하고,
자기 삶을 절제하고, 자기감정을 절제하고, 자기 마음을 잘 절제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지식)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하고 친밀(지식)해지면
우리가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탁월(덕)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해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희망일 뿐 아니라
세상의 희망이 되는 어디에 갖다 놓아도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참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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