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의 비유 눅17:5~10 -설교 스크랩, 출처보기-
▲중요한데, 간과하기 쉬운 본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무익한 종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다른 비유에 비교해서 그렇게 비중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유 말씀의 동기가, 제자들이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라는
부탁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보통 중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음을 더하려면, 무익한 종의 마음이 있어야 믿음이 더해진다> 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무익한 종... 사례를 바라지 않는다
▲성경 설명
종들이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돌아와서도 계속 일의 연속입니다. 주인의 밥상을 차립니다.
그러면 주인이 밥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배고플 텐데 와서 밥 먹어라’
말할 사람이 누가 있냐? - 아무도 없다고 하십니다.
말씀엔 주인이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들고’ 라고 한 후
‘자기가 다 먹은 다음에 먹든지 말든지 하라’잖아요.
‘주인이 명한대로 종이 다 순종했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지 않나요?
그런 종과 주인의 관계.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죠.
▲참된 믿음은 -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때
본문의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눅17:5
예수님이 ‘무익한 종의 비유’를 답변해 주신 것을 보면, 눅17:7~10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는 이것이 -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르게 설명 하면, 죽으나 사나 하나님을 위해 사는 종이 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서도, 하나도 뭘 바라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게 이런/저런 축복을 주실 것이다>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 그래도 세상 살기가 힘든데,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힘입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소망의 얘기를 듣고,
세상에서 지친 마음이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냐?
위의 성경 본문(무익한 종)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다!’는 말을 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 내 자식 위하고, 내 가정 위해 살기도 힘든 판에 하나님까지 위하라니,
내가 무슨 힘으로 하나님까지 위하며 살 수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며 살 수 있느냐/없느냐는 여러분의 사정이고,
성도가 참된 믿음을 갖기 위해 살아야 하는 마음가짐은 어떤 것이냐면
‘무익한 종의 비유’에 의하면
<종이 아무리 힘들어도, 밭에서 아무리 힘들게 일하고 왔어도,
또다시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데도,
수고한 다음에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안 해주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것이 마땅한 종의 자세>라는 겁니다.
‘내가 뼈 빠지게 일 했는데, 어쩌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안 해주냐?’,
이런 기대조차 안 갖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무익한 종은..,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사람
그렇다면, 지금 우리 기독교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럴 때 행복하다고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너무 잘 못 가르쳤어요. 그거 아니거든요.
뼈 빠지게 하나님을 위해서 고생하고,
그러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라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익한 종’, 즉 완전히 뼈 빠지게 아무 사례로 없이 일하는 종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나면.. 은혜를 비로소 체험합니다.
참된 믿음의 삶/하나님의 나라/에덴동산의 삶을... 비로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신경 쓰고, 최선을 다해 종처럼 노력하며 살기 전에는,
절대로 ‘복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익한 종이 되었는데... 의외로 하나도 힘이 안 듭니다.
이렇게 매몰차 보이는 듯이, 하나님이 나를 대한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님에게 ‘무익한 종’으로 철저히 섬기는 것 보다 더 큰 행복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면, 애드벌룬을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애드벌룬 떠받들고 가는 사람들을 봤어요. 붕붕 떠서 자리를 옮겨요.
겉으로 볼 때는 너무너무 큰 애드벌룬(하나님)을 두 사람이 받쳐 들고 가는데,
하나도 힘이 안 들어요.
반대로 애드벌룬 크기의 1/100도 안 되는, 역기를 드는 역도선수들 보셨지요?
3초 동안 들고 있기 위해, 목에 핏대가 서고 힘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잖아요.
*자식을 잘 기르기 위해 양육하고 도와주는 일이.. 역기를 드는 일과 같습니다.
-작아 보이지만, 무척 무겁고 힘듭니다. 내가 살아서 내 힘으로 할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애드벌룬 드는 일과 똑같아요.
-커 보이지만, 무지 힘이 작게 듭니다. 하나님이 다 도와주시니까요.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무거운 역기 들고 벌벌 떨면서 살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기준,
그것을 성도가 똑같이 갖고 있을 때.. 사는 것이 무지 힘들어요.
세상의 가치관은.. 역기와 같이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람은
그런 것들에 눌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한 사람’은
그 무게에 눌려서, 역기를 드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무지하게 크고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지만(내 십자가, 무익한 종의 삶)
사실은 애드벌룬과 같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고 쉽다는 것입니다. 마11:30
당신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하신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무익한 종은 <사례/감사를 바라지 않습니다.>
‘무익한 종’ 즉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내 자식이 잘 되기 바라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식으로 키울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감사헌금 했으니까, 우리 자녀 성적 잘 나오게 해 주세요’
그런 기대 안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서 수행하되, 무익한 종으로서,
내가 남편을 향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했다고 해서,
남편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떻게 잘될 것을 바라지 마세요.
나는 그냥 남편에게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요.
이게 믿음인데, 이렇게 하실 수 있어요?
‘무익한 종’이란, 세상적인 사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감사)하겠느냐? 눅17:9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응답 갖고 나와서 (사례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기도하고 있는 동안은
백날 천날 살아도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참된 믿음이 안 생겨요. 십자가 복음으로 못 사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더해지기를 원하면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지세요.
아무것도 바라지 마시고!
▲예를 들면, 흥부의 마음으로
단지 주인이 하라는, 밭 갈고 시중들고
그리고 나서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 들어도 바라지 말라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 바란다고, 안 주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희가 파지 않은 우물을 줄 것이며,
가꾸지 않은 포도원을 줄 것이며, 뭣도 뭣도 줄 것이며 .. 그러셨잖아요? 신6:11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분명히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지막지하게 주실 텐데,
하나님 뭘 주실까 따지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가 뭘 좋아하실까 만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흥부는 아무 사심 없이.. 병든 제비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부는, 잔뜩 욕심을 갖고서.. 병든 제비를 고쳐주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상상이지만) 주님이 겁나서 무슨 말을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 하시면
종이 되라는 말씀은 제쳐두고
‘그러면 뭘 주실까?’ 하면서 달려들면...
그래서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도 보면
‘무익한 종이 되라’고 말씀만 하시지
거기에 대한 무슨 보상/축복/인센티브/보너스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약속 안 했다고, 안 주시겠습니까? 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적으로 바라고, 놀부처럼 주님 섬기는 것은,
그런 섬김은 부담스러워 받지 않으시겠죠.
그러니까 본문에서 아무런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애당초 ‘무슨 보상을 바라는 마음’부터가
<무익한 종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죠.
▲불평하는 성도
내가 왜 불평이 나오고, 왜 불만이 나오냐 하면,
‘내가 이정도 했으면, 무슨 보상이라도 있어야 되는 것 아냐?’
라는 생각이 들죠.
자기가 주인에게 ‘그 정도의 감사는 들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렇게 수고/봉사/헌금했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람들은 보통 ‘꿈꾸고 소원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히11:1
성경을 전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란 먼저 ‘자기 죽음, 자기 소원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고나서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아버지의 뜻을 꿈꾸는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욕심/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 믿음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완전히 바닥(무익한 종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단 한방에 만났어요.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고, 사역을 열심히 했다고 만나는 것.. 아닙니다.
10년 지나야 만나는 것..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만납니까. 마음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야 만납니다.
즉, 무익한 종의 자리입니다.
‘내가 순장입네, 난 이 정도 믿음은 있는데’ 라는 생각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자기가 가장 못났다(무익한 종이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그 여자를 통하여, 그 동네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조금이라도 보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40평 살다가 30평 내려가면.. 죽는 줄 알아요.
큰 차 타다가 작은 차는 절대로 못 탄다면서요? 왜 그래요?
내가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인 줄 알게 되어 그래요.
그랜저 자동차와 자기를 묶어버려서
자기는 마티즈 타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줄 알아요.
정말 우스운 사람 많아요.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믿음이 생길 수 가 없어요.
▲나의 모습을 제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어딥니까?
십자가에 달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면류관이 이마에 박힌 모습이
제일 정확한 내 모습인 겁니다.
그것에 나를 묶어 버리세요.
자식 앞에서 남편 앞에서, 나날이 늙어가는 주름 앞에서
그 모습으로 나를 묶으세요.
중년 남성은, 샤워할 때 머리카락 한 웅큼씩 빠지는 것 보면... 가슴이 철렁하죠.
간담이 다 서늘해요.
여자분들은 얼굴에 주름 느는 것을 볼 때,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20대 사진보며 맨날 한탄만 하면 뭐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여 있는 모습이 나 라는 생각을 가지면,
90살이 되어 쭈그렁바가지가 되어도, 십자가의 모습보다는 나은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린 나.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뭘 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주시겠지만,
자꾸 뭘 바라고, 주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을 주님이 좋아하실까요? 그게 참된 '사랑'일까요?
(사랑 없이, 자기가 가진 돈 보고 좋아서 따라오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 사례도 바라지 말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주님이 주신 지금 내 형편을 감사하면서
무익한 종의 자세로 주님을 섬길 때 신앙생활이 쉬워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법입니다. 마11:30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매달려 있는 그 모습이 나 인데,
무익한 종의 모습이, 진정 내 모습인데,
거기에 참 행복/믿음/만족이 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지금의 형편에 대해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갖고
또 남편/자식/이웃에 대해 원망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내 형편이 그런데, 그 누가 나 보다 못한 자가 있다고,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이젠 오직 아무것도 받을 생각 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면 좋아하실지 생각하는,
무익한 종들이 되어서, 내 믿음이 더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09.02.19. 인터넷 설교 스크랩, 정리
........................ 더 읽으실 분 ........................
◑믿음이란?
▲호르몬 때문에.. 갱년기에 사람이 달라진다.
여기 앉아계신 분 대대분이 갱년기에 접어드셨을 텐데,
갱년기 장애들이 일어날 때, 큰 원인은 호르몬의 문제잖아요.
45살이 넘어가면 여자들의 체내에서 남성 호르몬이 나와서,
수줍어하는 맛도 없고, 거칠 것이 없어져,
전철에서 자리가 나면 10m 밖에서도 가방을 던진다면서요?
그래서 아줌마를, 여자도/남자도 아니고 ‘제3의 성’이라고 한답니다.
반면 남자들은 여성호르몬이 생겨서, 남편이 50살 넘으면 사람이 잘잘해 지죠.
잔소리 하고, 잘 삐지고, 그런 것들이 여성 호르몬이 나와서 그렇대요.
(전에 안 나오던)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사람이 바뀌고, 우울증도 온다면서요?
▲믿음은 호르몬과 비슷하다.
믿음이 이런 것과 비슷해요. 천국이 안 보이잖아요?
천국이 안 보이는 가운데, 천국을 가졌다는 확신과 다이내믹한 생명감,
역동적인 기쁨이 없는 것은... ‘믿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서입니다.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가치관>입니다.
이게 잘 안되죠.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안 돼서 에요.
그런 작용을 믿음이 해요. 믿음 자체가 그것이라고 말은 못해도,
돈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하고..,
천국을 보게 되는 것도, 믿음이 있다면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죠.
그러니까 상투적인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지 점검해 보시면 좋겠어요.
▲믿음은, 용기/신념/확신이 아니다.
그러면 여러분,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말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겠습니까?
돈이라면, 애가 ‘용돈 더 주세요!’ 하면, 1만원 줬다가 2만원 더 주면 돼요.
그런데 믿음은 이렇게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이라는 작용이 따로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 차원의 신념이나,
세상을 향해 나가는 용기(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갔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믿음을 더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은
우리는 뭔가 믿음이라는 내용이 있고 그것이 더 많아 지는 것으로 생각해요.
용기, 신념과 확신이 생기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거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믿음은 그냥 나 혼자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말입니다.
타고난 성질, 급한 성질, 느긋한 성질, 등의 자기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노처녀가 ‘내게 사랑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한다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는 게 아니고, 사랑할 남자를 달라’는 얘기 아닙니까?
‘믿음을 더해달라’는 말도, 예수님과 상관없이
나 자체 마음의 믿음이라는 것을 쌓아올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 헌신,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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