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거듭 나셨나요? 요3:1~21 09.04.19.설교스크랩
◑58세에 거듭난 여의사 이야기
▲눈에 띄게 생기발랄한 여의사
대개 병원에 가서 의사들을 접해보면, (의사 선생님들은 이해하고 들어 주세요.)
병원 일이 워낙 바쁘게 움직이고,
또 늘 아파서 얼굴 찌푸린 사람, 병으로 힘든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하루 종일 대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면,
방긋 방긋 웃고 얼굴이 생기발랄하고 활기가 넘치는 의사를 보기 드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병원에 갔다가, 눈에 띄는 여의사 선생님 한 분을 보았습니다.
그는 60대 여자 의사였는데 보기에 너무 달랐습니다.
그냥 옆에서 보기에 벌써 ‘아니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나!’할 정도로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고,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의사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저런 의사도 있구나,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런 밝은 얼굴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나? 어찌 저런 표정이 가능한가?’ 하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이분 이 더 놀란 것은, 그 여자 의사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옆으로 나오는데
두 다리가 모두 없더라는 것입니다.
▲남편 사별 후 자살 기도, 그 후 8년간 목숨만 연명하며 지내다
사실 이 여자 의사에게는 남다르게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의사로 활동하다가, 나이 50세에 갑자기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부부간 금슬이 남달랐던지라, 남편이 죽자 상실감이 너무 커서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 하고,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었답니다.
그런데 두 다리만 잃고 목숨은 건졌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이분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합니다.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니, 그때 이미 인생을 포기했었지만,
이젠 두 다리까지 없는 불구자가 되었으니, 무슨 소망이 더 있었겠습니까?
결국 이분은 노인 병원으로 환자로 보내졌답니다.
당시 50세였으니, 노인 환자들에 비하면 그 병원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침대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의욕이 상실되고 그저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지만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8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목숨만 연명만 한 상태에서.. 세월만 보낸 겁니다.
▲58세에 어느 날, 전도를 받다.
그런데 이분이 8년째 누워있던 58세가 된 해였습니다.
병원에 가끔씩 와서 환자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얘기도 해주고,
전도도 하는 팀이 있었습니다.
그 팀의 한 일원(이하 팀원)이, 이 부인(여의사) 앞에 와서 섰습니다.
그 팀원은 이미 간호사로부터, 부인에 대한 얘기를 들고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남편을 잃은 것도 큰 고통이고,
죽기로 작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지금 두 다리를 잃고 살아남아서
8년을 침대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고 세월을 보내다니...’
그 팀원은, 침대에 누워 있던 부인을 보고
자기도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그 부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접근을 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리고는 서로 눈을 마주 치면서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팀원은 보기 흉하게 잘린 다리를 만져주면서
‘얼마나 힘드시냐, 얼마나 힘들면 당신이 이런 고통을 스스로 취했겠느냐’면서
잘린 다리를 자꾸 만져주고 마사지를 해주었습니다.
아마 그래야 신경도 통하고 피도 통하는 모양입니다.
▲마음이 열리고, 얼굴에 광채가 비치다.
누구도 인생을 포기한 자기를 찾아와서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팀원의 위로에 누워 있던 이 부인도 놀란 겁니다.
그 팀원은 ‘하나님이 당신의 고통을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신 것은
당신의 이 고통을 면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팀원이 복음을 전하면서 맨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남다른 고통을 당했지만, 당신이 이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틀림없습니다.
천사는 두 다리가 없어도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 부인이 8년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 전도를 받으면서
자기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추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전도하는 팀원이 보기에도,
이 부인이 30여분 함께 대화를 하는 동안에
얼굴이 밝아지고 광채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의사로 활동을 재개하다.
얘기(전도)를 마치고, 기도가 끝나고 나니,
이 부인은 간호사한테 휠체어를 갖다 달라고 하면서
8년 만에 처음으로 침상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 부인은 자기에게 메시지를 전해준 그 팀원의 말대로,
아니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다리 없는 천사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새로운 소망이 생겼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목표를 제대로 잡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변화를 다 원합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이 부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때로는 절망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아픔이 있고,
때로는 부부간에도 말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얘기할 수도 없는
마음의 부담과 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가 다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정말 다리가 없든지, 돈이 없든지, 뭐가 없든지 간에,
우리가 없는 것은 많지만
그 자리에서 하늘을 나는 자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돈이 있으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위를 얻고 권력을 얻으면 하늘을 나는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두 다리가 있지만, 두 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닙니다.
결국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도 다 몸을 못 쓰는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상황을 극복하고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변화를
통과하는 사람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사람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주일날 예배라도 열심히 오면
우리에게 조금은 변화가 있습니다.
매주일 와서 예배드리면, 교양도 조금 쌓을 수 있고요,
듣는 게 좀 있지 않습니까?
성가대가 찬양하는 소리를 매주 와서 듣고 있으면 음악 듣는 귀도 좀 높아지고요,
감각도 조금 낳아지고요,
그리고 한 말씀씩 듣고 ‘나도 착하게 살아야지’ 그런 마음 품고 살면
윤리적으로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는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런 변화를 ‘변화’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의 변화/거듭남
▲이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한 놀라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변화의 자리에까지 이르는지
본문 성경에서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굉장히 많지만,
그 많은 사람을 성경에 모두 기록하지는 못합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이름만 달랑 한번 기록되고 언급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는, 좀 더 길게 기록합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존경받는 바리새인 + 공회원 니고데모
여러분, 니고데모의 변화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가장 도덕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신학적으로 좀 문제가 있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그룹들이 바리새인 중에 많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유대인 신앙공동체에서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게다가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이고,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친 사람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원로급들이 들어갑니다.
나이가 적어도 6~70들은 되어야 공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머리가 허옇고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그것도 동네 지도자가 아니고 국가적인 지도자입니다.
▲한낱 무명의 랍비 예수
이런 인물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를 생각할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잽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2천 년 전 당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 시골 갈릴리 출신에, 랍비도 제대로 된 랍비인지 아닌지
아무도 인정도 안 해주는 촌 출신이었습니다.
아마 표준말도 잘 못하고, 당시 랍비가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누구 문하, 무슨 학파’ 라고 하는 유명한 율법사들 밑에서 훈련을 받고
상당한 인턴, 레지던트 경력을 쌓아서
적어도 나이가 40쯤 되어야 엘리트 랍비고 존경받을 수 있는 랍비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우리 예수님은 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말리엘이니 뭐니 하는 그런 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대로 교육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랍비라고 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접했는지 참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었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공회를 통해 그런 정보를 빨리 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괜찮은 인격의 소유자, 니고데모
밤중에 젊은 랍비 예수를 찾아와서 ‘랍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니고데모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국가적인 지도자가 시골에서 올라온 예수에게,
오늘 우리 상황에서 말하면,
국회의원과 대법원 판사를 겸직하면서 신학자로 40~50년을 보낸
아주 존경받는 지도자가,
무인가 신학교에서 전도사 자격 하나 따가지고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나와 있는 어리벙벙한 젊은 사람에게,
‘랍비여!’ 우리식으로 말하면 ‘선생님이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듭남>을 가르치시면서, 특별히 니고데모를 선택하신 이유
예수님이 니고데모와의 관계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한 것이 놀랍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만약 요3장의 니고데모와, 4장의 사마리아 여자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을 듣는 주위 사람들은 다들
‘남편이 다섯, 여섯 명 바뀌고 험하게 산 여자니까 새롭게 태어나야지’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주위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그 사회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사람, 성경 지식도 가장 많은 사람,
존경받는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니고데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 수준의 사람을 주님이 일부러 뽑아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니고데모보다 평균 점수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만한 사람 별로 없어.’
(물론 우리가 ‘나 같은 인간 형편없고 보잘 것 없고’ 이런 생각도 하지요.)
하지만 불쑥불쑥 우리 마음에 ‘나만한 사람도 드물어’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가장 깨끗해 보이는 사람, 실제로도 가장 윤리적인 사람,
그럼 사람이라도 그들이 쌓아온 교양과 덕행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을 많이 쌓았다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수 십 년 경력의 신학자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분이며 경력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지도자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랍비여!’ 하고 가르침을 구하면,
니고데모를 좀 기분 좋게, 존중하며 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뒤를 밀어주면, 얼마나 일이 쉽게 풀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에게 대놓고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반말하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반말할 처지가 아닙니다.
주님은 공손하지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자 경력 적어도 40년, 국가적인 지도자, 아주 깨끗하고 존경받는 사람에게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소.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거요!’ 라고 한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참 고약한 말입니다. 모독성 발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그래도 목사 경력, 사역자 경력이 30년입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도 꽤 했습니다.
목사치고 저만큼 공부한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존경하는 분들로부터 훈련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 딴에는 제가 제법 괜찮은 목사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는 날도 많이 있지만요.)
그런데 나이 서른밖에 안 된 시골 전도사가 나타나가지고
‘박 목사, 당신이 아무리 목회 경력이 많다고 해도,
당신이 아무리 아프간 피랍사태 때문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해도,
당신이 목회학 박사 학위도 가지고 있고, 신학교 강의도 한 번씩 간다고 해도,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사람이요.’
라고 누가 제게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이런 밥맛 같은 인간 같으니라고!’ 그리고 아예 그 사람은 상대도 안 할 겁니다.
▲너무 중요한 문제라서, 말을 돌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에게
이렇게 정공법으로 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무례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목사 30년이 아니라 300년을 해도 소용없다.
성가대 30년이 아니라 100년을 해도 소용없고,
주일마다 꼬박꼬박 와서 예배드리는 것 20년, 100년을 해도 소용없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너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님은 바로 그 말씀을 이렇게 강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을 예를 들어서
오늘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착각)하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늙었지만 청년의 생각으로 살았던 니고데모
여러분, 니고데모가 연세가 많은 분이 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이분은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의미로 ‘청년’이었습니다.
노인은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는다고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노인입니다.
또한 노인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노인은 겪어봐서 다 안다’는 자존심입니다.
그러니까 못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분인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영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젊은 랍비 예수를 찾아온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싱싱한 ‘청년’이었습니다.
▲훗날 니고데모의 성숙한/아마 거듭난 모습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이때 만나고 난 다음,
그의 행적이 요한복음에 두 번 더 언급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후에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두 구절이 나옵니다.
①요7:50절에 보면, 예수님의 3년 사역이 끝날 무렵 체포되기 직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리에서,
바리새인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율법은,
그 사람 말도 들어보지 않고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냐?’
3년 전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한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위기를 만났을 때
숨은 제자로 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해 정면으로 나선 것입니다. ↑
이렇게 놀랍게 변신된(아마 거듭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②요19:39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식 때
마침내 전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몸에 바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나타나서
예수님의 장례식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세우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끝장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23제자들도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숨어 있었던 제자 니고데모는
12제자와 비교했을 때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가진 것이 없어서 별로 잃을 것도 없지만,
니고데모는 가진 것이 많아서, 잃을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위험한 상황에 공개적으로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것 다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장례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드러나는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여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교회 안에 전해져오는 야사에 기록된 얘기 로는
니고데모가 영국에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야사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단호하고도 강력한 어조를..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 더 태어나야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버벅거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겁니까? 뭡니까?’
그러자 주님은 사정없이 얘기를 하십니다.
‘당신이 율법선생으로서, 평생 동안 성경을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것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우리 주님도 좀 그렇지요.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지체가 높은 분이 잘 깨닫지 못하면
‘아 선생님, 이해가 잘 안되시는 모양인데 내가 다시 한 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주님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는지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니고데모를 앞에 세워놓고 지금 우리 모두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 30년 한 것 아무 소용없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장로 40년 한 것 아무 소용없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 열심히 다닌 것 그것도 아무 소용없을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교회에 무슨 명예심을 얻기 위해 다닐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강력한 메시지로 우리를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고백은.. 반드시 삶이 뒤따라 와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설명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그러나 이런 고백은,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즉 나의 주권자로 ‘로드십 Lordship’을 고백하고 사는 것은
말은 쉬운 것 같지만, 실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이 필요로 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런 입술의 신앙고백에는, 반드시 삶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거듭난 여 의사'를 보십시오. 그의 환한 미소와 친절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은 ‘완벽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점진적 성장 progress’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마치 주가지수가 up and down 하면서도 계속 꾸준히 올라가듯이,
거듭난 성도의 삶도 up and down 하지만...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progress의 궤적이 만약 없다면
여전히 신앙생활이 하나의 무거운 짐이요, 남에게 외식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주님께 진지한 질문을 드려야 합니다.
(후략) ▣ 거듭남,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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