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마8:18~22 -07.12.12.설교스크랩,정리-
▲단순한 ‘물질적 청빈’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유 말씀은, 흔히 쉽게
‘예수님께서 집도 절도 없이 가난하게 지내셨다’ 라고 이해합니다.
그런 ‘물질적 청빈’의 뜻보다, 보다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온 문맥을 살펴보면,
먼저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8:19
이 때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박대하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8:20
즉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이 말씀의 뜻은,
1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은 정말 쉴만한 안식처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살 집이 없다는, 부동산적인 개념은 2차적/3차적인 것이지요...
자세히 살펴봅시다.
▲서기관이 따르면, 붙잡는 것이 상식입니다만... 내치십니다.
서기관 이라고 하면 제법 그 사회에서 이제 명망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사회적으로 제법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 상류층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저 같은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고마울 것 같고, 그 사람에게 딱 달라붙을 것 같아요.
지금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어쨌거나 서기관 정도 되면 반가울 것 같아요.
고기 비린내 나는 어부들이나,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들 데리고 다니시다가
어엿한 서기관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시면... 뭔가 좀 정비된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을 아주 박대하십니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이 제자로 편입하려는데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는데, 네가 나를 정말 따를 거니?’ 하면서 냉대합니다.
바로 그 다음 장면은,
어떤 제자가 자기 아버지 장사지내고 온다니까
‘죽은 사람은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마8:21~22
이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하고 서기관은 쫓아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서기관을 쫓아냈다는 말은, 본문에 안 나오지만, 전체 정황으로 보면)
‘머리 둘 곳 없다’는 뜻은 서기관의 마음을 간파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서기관이 다가오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런 마음으로 나를 좇으려면 나를 좇을 필요 없다’ 하시며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 가버리십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무리를 피하시면서 마8:18
서기관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을 하셨을까요? 마8:19~20
▲예수님의 인기를 실감하면서, 따르려고 했던 서기관
이 장면 조금 앞에 보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 같고 서기관 같지 아니하더라. 마7:29
라는 말씀이 나와요.
무슨 얘기냐면 서기관들이 학자인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무리들이 놀래요.
서기관들은 가르침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 사람이 대단한 랍비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예수님에게 줄을 서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자가 되려면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저는 이거 아주 실감해요.
내가 영락교회 있을 때 장로님들이 60분 정도 계셨는데,
크게 나누면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세 그룹이 다 저를 좋아하셨어요.
태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고,
많은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서... 저를 좋아합니다.
꼭 흥행사들 같아요. 스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흥행을 일이키는 사람들처럼
교인들이 좋아하는 목사를 좋아해요.
나중에 제가 설교를 끝내고,
식사하면서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 봐도,
장로님들은 대화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설교를 잘 안 들었어요.
설교는 잘 안 듣지만, 항상 제가 설교하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마치 서기관 같은 마음이라고 봐요.
▲예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려고 하는 마음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그 서기관은, 자리를 못 잡고 떠돌던 선비가
이제 사회적으로 안정된 정박지를 찾았다고 믿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을 두고 안심하고 머물러서
자기 생애를 잘 꽃피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고 믿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간파하시고
내게 와서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삶의 환경이 주어진다든지,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도록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내게 와서는, 전혀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경력 있는 과외선생의 말에 의하면,
학생의 부모님을 딱 만나면 웃으면서 첫마디가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한 마디 한답니다. 그러면 부모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나요?
바로 이 서기관이, 그런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온 것을
예수님은 박대하십니다.
‘나도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지 않아,
전혀 이 세상에서 안심할 환경을 추구하거나, 갖거나 하지 않고,
내 제자들에게도 그런 안심거리를 주지도 않아.
내 머리 들 곳이 없어. 안심하고 누울 곳도 한 군데도 없어!’
하시고 무리를 피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그런데 이런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단 서기관뿐만 아니었습니다.
무리들도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서기관과 똑같아서.
이 세상에서 안심해도 되는 처지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요즘 목회 상황으로 볼 때는 맞지 않는 겁니다.
요즘 목회자들은 오히려 ‘교회 와라. 안심시켜줄게.’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늘에.. 머리 둘 곳을 정하신 예수님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모처럼 명망 있는 제자가 들어 올 뻔 한 것을 파토 내시면서
곧바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마8:23~
방금 전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해 놓고서,
예수님은 지금 배 어디에 머리를 두시고 잘~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8:24
이거 말이 좀 이상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머리대고 누울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해 놓고선,
사람들 다 쫓아 보내고 나서 곧바로 배 위에서 머리를 두시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머리들 곳이 없다고 하신 분께서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어부들이 죽겠다고 두려워 떨며 난리는 치는데 주무신 상황.
이 상황은 어떤 상황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안심할 곳이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늘이었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안심할 것을 찾으려고 하지? 자네, 헛다리짚었네.
네가 그런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쫓아다녀도 그건 소용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이 땅을 살고 있거든.
결코 이 땅에서 마음 놓을 만한 일들을 만들 생각이 하나도 없어.
나 좇아서 이 땅에서 안심할 만한 것 찾으려면 아예 관둬라!’
이게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에요.
◑적용
▲대학에.. 머리 두지 마세요!
여러분의 자녀 중에 누가 S대에 들어가면, 부모가 마음에 안심이 되죠.
‘얘가 이 조시로 나가면, 생이 다림질 한 것처럼 쭉 펴지겠구나!’ 안심이 되죠.
그런데 저기 지방 어느 대학에 가면 전혀 안심이 안 되죠.
그 아이의 장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믿는다고 믿는 거.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하십니다.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을 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이 세상에 머리 둘 곳 없는 사람이, 불안한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다리 쭉 뻗고 잡니다.
여러분, 이상해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머리 두고 편하게 잠자요.
이상하지요? 너무너무 신비하지 않아요?
반대로 이 땅에서 안심할 곳을 찾는 사람들은
늘 안심할 곳이 확보될 때까지는 불안에 떱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건강이 어떻다. 요즘 건강진단 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다면 한 턱 낸다면서요?
여러분, 조금씩 아프면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더 생각나고
내가 정말 살아왔던 불순한 삶의 태도도 고치기도 하고 그러지..,
뭐 그렇게 건강한 게 좋다고 난리들을 칩니까?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여기서 이 땅 위에서 안심할 장소를 찾으려고 바동거리면
계속 불안에 떨게 됩니다. 어디서도 편안하게 잠을 못자요.
그런데 이 땅에서 안심할 장소나 안심할 환경 여건을 찾지를 않아요.
그리고 하늘에 마음을 둬버려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이 땅에 대해서 죽는 거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가 죽은 것이라고 고백을 해버리면
즉, 이 땅에 대해서 죽으면서
이 땅에서 안심할 장소를 찾으려고 마음을 안 먹게 되면
특징이 뭐냐? 이 땅(세상)이 아래로 보여요.
다시 말하면 다 조그만 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비행기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여러분, 실제로 비행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세상이 작게 보이잖아요.
우리 마음이 저 하늘에, 내 머리 둘 곳을 두면서 살 때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작게 보이면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머리 두고 잘 주무시는 예수님’
우린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이런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서 주무시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주무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마8:18~22절의 전체 문맥 속에서 보면,
'예수님을 주무시게 해서는 안 되고/예수님이 못 주무시도록 깨워야 하고...'가 주제가 아닙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속에서도
'인자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것이 ...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까.
풍랑이 없는 바다를 주신다는 게 아니에요.
풍랑이 없는 형통을 주신다는 게 아닙니다. 무얼 주실까요?
풍랑 속에서 깊은 잠을 주십니다. 잠이라는 게 뭘 상징하는 겁니까? 평화죠.
풍랑이 일어야 평안이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잔잔한 바다에서 잠잔다고 마음이 평온하거나 할 수 있겠어요?
풍랑은 일어나는데.. 마음은 잔잔할 수 있다는 것.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처럼, 마음을 하늘에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안심할 수가 있다는 거.
참 이상한 역설 아닙니까!
땅에서 안심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어 안심하고
유명한 선생 밑에서 안심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서 안심하고
건강을 확인하고 안심하려고 했는데
그 안심을 원하는 동안에는 불안에 떨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아예 이 땅에서 안심을 안 찾아, 아예 안심할 환경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버리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태풍이 오건, 풍랑이 임하건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마음이 얼마든지 쿨쿨 잘 수 있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찾지 않는 모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합니다.
▲제가 과거에 잠 못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때나 잘 잡니다.
제가 군대 간 나이가, 대학교 못 들어가서 삼수하고 갔으니까 22살 때.
논산에서 훈련받을 때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에서, 제가 잠자는 시간에 혼자 앉아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훈련조교 하사가
‘무서워 이 녀석이 진짜, 미친놈 아니야?’ 그러는 거예요.
미친놈처럼 보이죠. 논산훈련소에서 잠을 안자니까!
잠자는 시간에 잠을 안 자가지고 제가 뭐를 했게요?
기도를 했어요.
제가 그때 싸웠었어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가/복음이,
내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저도 잠 못 자고 힘들어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이제는 아무 때나 잘 자는 거예요.
그런 싸움이 다 끝나고, 이제는 아무 때나 그냥 잘 잡니다...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을 찾지 마세요. 안심할 곳을 찾지 마세요.
오직 하늘에 머리 둘 곳을 찾으세요.
그리고 예수님처럼,
바다에 풍랑이 일더라도 편히 주무세요!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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