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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매일 죽음과 매일 자폭 2086

LNCK 2009. 9. 16. 18:03

◈매일 죽음과 매일 자폭                왕하6:24~7:2                     -08.08.29.설교스크랩/정리-


 

자기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면... 만사가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 쉽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죽음을 자꾸 피하려고 생각하면,

만사가 사는 것이 화가 나고, 원망스럽고, 정말 어려워집니다...

 


◑본문 설명


▲포위 된 가운데 굶주려 죽게 된 사마리아 성

아람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수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상태입니다.

포위하고 둘러싸서 외부 보급로를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 성내의 사람들에게 

이제 기근과 굶주림이 심하게 찾아오기 시작한거에요.


얼마 동안 그렇게 포위망을 풀지 않고 지키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나하면 나귀머리 하나에 80세겔,

    원래 나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를 해가지고 먹을 수가 없게 돼있어요.


그리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얼마다 그랬는데, 가격이 폭등했다는 말이지요.

원어로 ‘비둘기 똥’(합분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집비둘기 합鴿, 똥 분糞, 콩 태太(여기선 콩 태)

콩을 추수하고 나서, 전혀 상품가치가 없는 다 썩어문드러진 그런 콩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모아놓고 ‘비둘기 똥’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모양이 비슷하니까...

그런데 그런 썩은 콩들조차도 도저히 돈 주고도 구할 수 없을 만큼

물자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너무 힘든 상황에서 여호람 왕이 성을 걷고 있는데,

한 여인이 왕 앞에 나와서 도움을 청하면서,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하루는 내 자식을 내서 같이 잡아먹었는데,

다음날은, 자기 이웃이, 자기 자식을 내놓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이 얘기를 듣고서, 왕이 그동안 참고 기다리다가 피가 거꾸로 도는 겁니다.

그래서는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자객을 보내요.

자객을 보내놓고도 분이 안 풀려서,

자기가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그 자객의 뒤를 쫓아갑니다.

그만큼 왕이 분통이 터졌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엘리사가 자객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 그 주인의 소리가 그 뒤에서 들리는 것을 모르겠느냐?’  왕하6:32 

여호람 왕이, 자객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왕이 왜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과거에 아람이 작전을 짜면, 엘리사가 미리 알아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아람이 도단 성에 포위망을 둘러치고 엘리사를 잡으려 했을 때도

적군의 눈을 멀게 해 가지고, 사마리아 성으로 데려와서 생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왕이 ‘다 죽일까요?’ 하고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왕하6:21

그 때 엘리사가, 살려주라고 해서, 도리어 음식을 먹여서 돌려보냈습니다. 6:22~23 

그리고 한 동안 아람의 침략이 없었습니다만..,


이어지는 왕하6:24절에, 오늘 본문이 시작되면서,

사마리아가 아람의 침공을 받고, 성중은 엄청난 기근에 빠집니다.

얼마나 기근이 심한지, 자기 자녀를 잡아먹어야 될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람 왕이, 옛날 생각이 났겠지요.

그 때 차라리 아람 군대를 몰살시켰더라면, 오늘 이런 후환이 없었을 터인데,

그 때 엘리사의 말을 듣고, 아람 군대를 평안히 돌려보낸 결과,

오늘과 같은 엄청난 재앙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 가서 뺨맞고, 어디 가서 분풀이 한다’는 식으로

일단 엘리사 선지자를 죽여서, 분풀이부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사의 집에서, 왕이 장관들과 함께 도착을 하고,

    거기서 엘리사가 예언을 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아람 군대가 철수하고,

    사마리아 성에는 곡식 가격이 폭락하게 될 것이다.’ 왕하7:1~2


◑해석


▲극심한 기근은, 하나님의 징계

그러면 질문이 있어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엘리사를 통해서 작전까지 미리 알아서 대처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엄청난 고통에 빠뜨리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자식까지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분명히 여호와하나님께 대한 관계가 비뚤어졌기 때문인 것임엔 틀림없어요.

레위기26:27~29에, 또 신명기에도 그런 얘기가 나와요.

‘내 말을 청종치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결국 너희가 자식의 고기를 먹는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성경은 미리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면.. <자폭>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근 중에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는 여인을 보면,

또한 징계를 당한 상황에서 엘리사 선지자를 잡아 죽여서 분풀이 하겠다는 왕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폭하게 됩니다. 더 심하게 망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죽으려고> 결심하니까, 오히려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상황을, 비슷한 상황인 사르밧 과부의 기근과 비교해서 살펴봅시다.

엘리야 선지자 때, 기근이 3년 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아람군대가 3년 반이나 길게 포위하고 있었겠습니까?)


사르밧 과부도 그 당시에, 도저히 먹고 살게 없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서로 잡아먹던 여인들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가루를 기름에 섞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남은 가루 한 웅큼마저, 엘리야 선지자에게 줘 버립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나아간 것입니다. (이방 여인인데도 믿음이 대단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으로 나를 몰아가시면, 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사르밧 과부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구원이 임했습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신약에도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는 말씀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그러나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은, 그리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 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갈 데까지 다 가 버렸습니다. 최악의 상황까지 간 것입니다.

막판까지 가서 겨우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왕하7장) 

아예 처음부터 순순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였더라면,

아람 군대가 더 빨리 물러갔을 것입니다. 더 빨리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엘리야에게 그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웅큼마저 바쳐버린 것 아닙니까!


만약에 본문의 사마리아 성의 여인들이, 자기들이 죽기로 작정했더라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겠습니까?

살려고 발버둥치니까, 서로 자식까지 잡아먹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호람 왕이, 죽기로 작정했더라면

괜히 엘리사 선지자에게 분풀이하려고 했겠습니까?

오히려 겸손히 회개했겠지요.

 

아마 사르밧 과부가, 살려고 발버둥쳤다면,

먹을 것을 달라는 엘리야에게  왕상17:11

‘뭐, 이 기근에 가루를 달라고?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네가 하나님의 사람 맞아?’

그러면서 동네사람을 부추겨서, 하나님의 보냄 받은 엘리야를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구원(일차적으로 문제 해결)을 받지 못했겠죠!                        

 

 

◑적용


▲큰 매를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 성의 여인들은

하나님이 죽으라고 주신 상황에서

자꾸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먹을 게 없으니까, 평소에 안 먹던 나귀 머리, 썩은 콩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 자식들까지 잡아먹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빨리 죽으려고 결심했으면,

그래서 사렙다 과부처럼 이제 죽겠다고 나섰으면,

아마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를 빨리 돌아가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극한 상황(큰 매)까지 갔습니다.

(그들이 돌이켰는지, 안 돌이켰는지 본문에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극한 상황까지 내몰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은 포위를 풀어주시고, 아람 군대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보면, 작은 매를 맞고도, 빨리 돌이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매를 맞으면.. 눈도 깜빡 안 하고,

보통 매를 맞아도.. 끄떡없고,

완전히 큰 매를 맞아야... 비로소 울며 불며 돌이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쉬워집니다. 모든 문제가 다 풀립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죽으려고 하면... 상황이 도리어 쉬워집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여기면... 화낼 이유도, 남에게 분노/원망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살려고 하면... 사마리아 성 꼴이 됩니다.

남 탓을 하게 되고, (엘리사를 탓했습니다.)

자기 자식까지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목숨(명예 등)을 건지려고 합니다.


종종 하나님의 시험은

그 목적이 우리의 자아를 죽이시는 시험입니다.

진짜 우리를 죽여서 지옥 보내고, 완전히 멸망시키는 그런 시험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그런 시험입니다.


그 합격선(커트라인)은 ‘내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네가 죽으면 쉬운데, 너는 왜 아직 안 죽느냐?' 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시험을 보내십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그런데 내가 살아야 되겠다고, 살 길을/탈출구를 모색하는 동안

나를 둘러 싼 포위망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은,

남편을 탓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보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자기 원수를 보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십자가에서 내 죽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내 맘에 고통이 사라집니다.

처음에 죽을 때야 잠시 아프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아예 편안합니다.

 

    그 다음 장에, 사마리아 성의 문둥이 4명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성밖으로 나갑니다.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왕하7:4

    그랬더니 오히려 살지 않았습니까?

    자기들만 산 것이 아니라, 모든 성중의 사람들을 다 살렸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이 사마리아 여인들이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만 국한되어있는 이야기 같아요?

아닙니다. 굶주려서 제 자식 잡아먹는 것,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어요. 내 마음에 행복이 없어요.

남편하고 사는 것도 오래 되니까.. 뭐 그렇게 짜릿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자식을 기르면서, 그 자식을 통해

내 기쁨/내 자아만족/내 성취욕에 굶주린 내 배를 채우려고

지금 우리가 자식들을 잡아먹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닌 것을,

이거 시켜보고, 저거 시켜보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내 행복의 굶주림을 위해서.. 우리가 자식을 잡아먹고 있다니까요.

 

‘너는 왜 안 되니? 옆집에 철수는 되고 있는데, 너는 왜 안 돼? 이 자식아!

너를 보면 속 터진다, 속 터져!’ ... 이게 바로 자폭이지요. 속에서 터지는 자폭.


▲‘죽음’과 ‘자폭’의 차이

어떤 엄마가, 제 설교를 듣고,

옛날처럼 자녀가 공부를 안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든지 딴 짓을 하면

그냥 즉시 다그치거나 야단치던 것을.. 이제는 꾸욱 눌러서 참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으라하니까... 자녀를 야단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참는데

너무너무 마음에서 자식 놈을 보면 분통이 터져가지고

그렇지만 ‘죽으라, 죽으라’하는 말씀이 기억되니까

맘대로 막 터트리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고 꾹 참고 있는데

급기야는 그 마음의 울분이.. 눈물로 나오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폭이지요.

자기가 죽은 게 아닙니다. 죽은 체 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으면 눈물이 다 나오겠습니까마는,

(하여간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제가 혼자 웃었습니다.)


정말 자기가 죽은 사람은,

자기 체면, 자기 위신, 자기 명예, 자기 자존심이 다 죽었기 때문에

자기 남편, 자녀, 이웃, 친구가 자기 성에 차지 않아도

부글부글 하거나, 분내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자기가 죽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죽는 것도..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루아침에 안 되지요!

내 생각으로 죽는 것은.. 당장 1초만에 쉽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몸으로 죽는 것은.. 진짜 죽는 고통과 갈등에 휩쌓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날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입시다.

만약 내가 안 죽으면.. 결국은 ‘자폭’하게 됩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나, 환경의 고난이 닥쳐오면,

살 길을 택하지 마시고, 대신에 죽을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는 정말 죽음을 경험해야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 길을 자꾸 택하면... 결국은 갈 데까지 가게 됩니다. 가장 큰 매 골라서 맞습니다.

내가 죽을 길을 빨리 택할수록... 작은 매를 맞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빨리 ‘죽으라고’.. 그래서 빨리 다시 잘 ‘살라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섭리로 이끌어 가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치 포위된 것 같은, 어떤 최악의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 항복하고 죽겠습니까?

아니면, 자녀를 희생시기까지 하면서.. 내가 안 죽으려고 발버둥/발악 하겠습니까?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