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보람과 동시에 고통 잠14:26 모두 펀 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14:26
◑아들을 위해, 산채로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
일제 강점기 때 여학교를 다닌 할머니께서, 일본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 성주가 성을 짓고 싶어 하였는데, 성을 지을 때 그 성의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을, 돌과 함께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그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 고 약속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던 것입니다.)
이에 평민인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아들은,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기를 위해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모진 고통을 참아 낸 것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힘을 준 것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자기 옆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주고 고통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진정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용>
나에게는 상담하기 위해 찾아오는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단락 펀글)
그들을 만나면 대부분 첫마디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왜 죽지 않고, 나를 찾아 왔느냐?’고 되물으면
십중팔구는 자기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그토록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자신만을 믿고 있는데
그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아마 어머니도 못살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는, 어머니의 희생의 가치를 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찾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주시면서 사랑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재수 좋은 날
오늘 하루는 제게 참으로 신명나는 하루였습니다.
아이들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르르"하는 진동이 왔습니다.
제가 가장 받고 싶은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10여 년 전쯤에 이곳(청소년 재활시설)에서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이름을 듣자마자 즉시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 친구가 당시 온 집안을 뒤흔들던 유명했던 장난꾸러기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고 안치고 잘 지내냐?"는 제 농담 섞인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따, 신부님도. 이제 저도 벌써 나이 30이여.
온양에서 조립식 주택 짓는 일 하고 있는데, 이제야 조금 자리 잡았슈.
이제 장가가는 일만 남았슈. 한번 놀러 갈께유."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10시 미사 때는, 또 다른 한 친구가 미사 시간에 맞춰오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 역시, 이곳 출신으로서, 8년 동안이나 저희와 함께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미사 후에 그 친구와 차 한 잔하고 있는데, 또 다른 두 명의 출신자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점심이라도 한끼 하려고 나가는 순간,
또 다른 친구를 만났고,
또 그 친구가 전화를 해서, 또 다른 친구를 데려오고...
그래서 정말 너무도 기쁜 하루였습니다.
다들 홀로 아등바등 세상을 헤쳐 나가느라 얼굴들이 많이 삭았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사고뭉치들, 안쓰러운 아이들로만 보였습니다.
용돈 때문에 저하고 티격태격하고 싸웠던 철부지 시절의 아이들 모습,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삐쳐서..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어
제 속을 태우던 말썽꾸러기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나마 아이들을 성장케 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제가 늘 고민하는 한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따끔한 매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엄격한 규칙일까? 보다 완벽한 교육시스템일까?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겸손이란 옷을 입은 교육자의 헌신과 봉사> 그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교육자가 지녀야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겸손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가 아이들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는 것,
-아이들을 위해 한번 인내하고 좀 더 희생하는 것,
그것처럼 바람직한 교육적 봉사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교육자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교육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부모나 교육자들은, 보다 자주 아이들을 향해 고개 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야, 미안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부족했다",
"미안해! 내가 좀더 너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되는데..."
우리가 참 부모 참 교육자로 거듭 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권위를 버리는 순간, 겸손하게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국>
◑불은.. 모든 것을 불사르고, 또한 사방에 번집니다.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저도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큰 사고 중 하나는 제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많은 아주머니들이 마당에 솥걸고 음식을 만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잔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불을 유난히 좋아하여, 부지깽이로 불놀이를 하던 저는
부지깽이에 붙은 불로 우리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집이 타올랐지만
다행히 어른들이 많이 계셔서, 집을 다 태우지 않고 불을 껐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불의 속성을 일찍 깨쳤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고, 불은 번진다는 것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 태워 없애버립니다.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입니다.
불은 또한 번집니다.
작은 불이 그래서 큰 불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작은 빛과 열도 번지면.. 큰 빛이 되고, 큰 열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안에 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火이 부정적으로 불살라지고, 번질 수도 있고
이 불火이 긍정적으로 불살라지고, 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불火이 욕정欲情이 아니라, 열정熱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욕정은 타서 재가 되지만
열정은 타서 빛이 됩니다.
(특히 청소년을 자녀로 둔 가정은, 이 제목을 놓고 기도합시다.)
열정이 열정으로 번지고
빛이 더 큰 빛으로 번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선>
◑자녀는.. 보람과 동시에 고통
오늘날 자녀라는 존재는,
저들을 키워 가는 부모에게 있어서.. 보람이면서 동시에 고통입니다.
많은 경우, 자녀들이 부모의 기대처럼 자라주지 않을 때,
부모들은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자녀 양육에 있어서, 부모의 책임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만,
그러나 자녀양육에 실패했다고 느낄 때.
‘그 책임을 부모가 전부 다 모조리 져야만 하느냐?’ 는 것은
저/설교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적으로 이것은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결코 부모에게 부속된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한 개인적 존재들입니다.
비록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나고,
그리고 부모의 중요한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이고 개성적 존재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개인적 책임인 것처럼,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마지막 책임은
‘결국 자신이 져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문자 그대로 완벽한 환경 속에 자랐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부모가 있다면..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길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죠.
그것은 누구 책임입니까?
네, 자기 책임입니다. ‘지 책임’이에요!
②우리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아마 이 땅에서 가장 완벽한 스승 밑에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고, 직접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또 함께 여행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직접 예수님께 삶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완벽한 스승이였던 예수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자라났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반역한 제자 가룟 유다가 있었고
배반한 제자 베드로가 있었다, 저는 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제 설교 듣고도 타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예수님 제자 가운데도 유다가 있었고, 또 배신한 제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누구 책임이에요?
따라서 하십시다. ‘지 책임이다!’
우리 자녀들의 실패와 회복,
그들이 신앙적으로 실패할 때, 혹은 인생에서 실패할 때
그들의 회복을 돕기 위해서 부모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 깊이 기도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부모가 너무 죄책감을 느끼다 보면,
너무 그 자책감에 빠져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펀 글)
*관련글 : 부모의 죄의식이 아이를 망친다
◑비범한 인물들의 특성
모차르트나 프로이트처럼
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비범한 인물들은
자기가 남과 다른 점을 알아차리고, 그 점을 활용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취약 분야는 무시하고,
대신에 ‘내가 추구하려는 영역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나의 장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고, 효과적인 답을 찾아 대응합니다.
‘성과는.. 약점 보완보다는, 강점을 강화하는데서 산출된다’는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교수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잘할 수 있는
특정 분야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모든 재능을 다 갖출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갖지 못한 재능을 갖추려는 노력,
즉 약점 보완보다는
자신이 가진 차별적 강점 강화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게 보다 효과적입니다. <행복경영
◑새댁이 한쪽 눈을 감고 사는 이유
어느 날 화가의 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짐을 다 내리고, 새댁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는데,
그 아기의 한쪽 눈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사고로 그랬는지
그 예쁜 얼굴에.. 한쪽 눈이 흉측하게 감겨져있는 겁니다.
며칠이 지나고 화가가 우편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2층 계단위에서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안고,
한쪽 눈을 감고 쩔룩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그 화가는 마음속으로 ‘참 이상한 여자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한손에는 아기 사진을 들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사진은 감출수가 없지요. 사진 속 아기의 한쪽 눈이 감겨있었습니다.
아기엄마는, 자기 안방에 예쁜 아기 초상화를 달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잘못된 한쪽 눈도 예쁘게 그려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화가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화가는 아기의 초상화를 며칠 동안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떨면서, 아기의 눈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고,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아기 엄마에게 가져다주니, 그 엄마는 너무나 좋아하며
화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아기가 조금 더 크면, 제 한쪽 눈을 아기에게 이식해주기로 했답니다.
그 생각만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부터 길을 갈 때나, 밥을 지을 때나,
빨래할 때나, 한쪽 눈을 감고 살아가는 연습을 한답니다.”
◑보다 사랑하지 않은 죄
마25장에서는 더 명확하게 ‘큰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심판 때 다루시는 죄는, ‘큰 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목말라하는데.. 마실 것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를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은 죄,
-누군가가 추운 날씨에 덜덜 떨고 있는데.. 입을 옷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데.. 병문안 한번 가지 않은 죄,
-누군가가 감옥에서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죄...
결국 예수님이 크게 보시는 죄는
‘보다 적극적/실천적인 것들’입니다. 할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죄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죄 개념은 매우 소극적입니다.
-거짓말 안 한 것,
-OOO 안 한 것,
내가 소극적으로 OO죄 안 저질렀다고, 나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청문회처럼 물으실 때,
출제 경향을 잘 못 맞추었다고 후회해서는 큰 일 납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유심히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눈물의 골짜기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근심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길 바랍니다.
세상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세상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고,
세상의 구원이 내 구원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하는 제목들이, 소극적입니까, 적극적입니까?
적극적으로 마땅히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죄들을, 회개합시다. <국>
사도 바울이 가장 싫어한 사람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단락 펀글)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변질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최대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죄로 시작해서 죄로 끝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합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들과 관점이 다릅니다. 목표가 다르고 접근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참 신앙인의 목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면,
참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sin management가 아니라 mission management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관리하다가 죄로 죽을 것이 아니라, 사명을 관리하다 죽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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