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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17장의 다윗의 기도

LNCK 2010. 12. 21. 18:57

 

◈역대상17:장의 다윗의 기도         대상17:1~27.              10.11.10.인터넷설교 녹취

 

 

▲본문의 배경

역대상15, 16, 17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안치된 다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윗이 이제는 ‘내가 편안히 백향목 궁에서 사는데, 내 집은 이렇게 화려한데,

어찌 하나님의 언약궤는 그야말로 임시 천막에 있는가?’  :1

 

다윗이 이렇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가 나서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계획을 얘기했을 때,

나단 선지자는 ‘왕이여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소서’  :2 

처음에는 이렇게 무조건 찬성했다가,

 

나단 선지자가 집에 돌아가서, 그 날 밤에 기도하는 가운데,

‘네가 아까 다윗에게 했던 말을 번복해라. 다윗이 성전을 짓지 말도록 해라.

어떻게 네David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겠느냐,

오히려 내가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 집을 지어주고,

네가 죽은 다음에, 네 몸에서 날 네 자손이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할 것이다.’

하는 예언의 말씀을 주신다. 대상17:3~14절

 

이 말씀을 나단을 통해 전해들은 다윗은, 마음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하나님께 올려드린 기도가 대상17:16~27절에 나온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를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관련글 : 솔로몬의 기도

 

 

◑1. 기도는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본문에 다윗의 기도 내용을 보면, 거의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분량과,  3~14절

다윗이 그 말씀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받고 기도한 내용이  16~27절

거의 길이가 비슷하다. 둘 다 12절씩이다.

 

즉, 기도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을 때,

그 받은 말씀에 감격, 감동할 때,

흥분된 마음으로 기도가 술술 나온다는 것이다.

본문의 다윗이 지금 그렇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전형적인 기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 - 기도는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꼭 중요하게 명심해야 한다.

 

▲25절에도, 이 사실이 명확하게 나온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왕조를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대상17:25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생겼다는 고백이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야, 우리가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기도가 힘든 이유는, 말씀을 너무나 약하게 붙잡기 때문이다.

성경을 너무 안 읽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너무 적게 듣기 때문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받은 말씀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계속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동시킬 때까지.. 성경을 읽자.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고, 뜨겁게 기도시키실 때까지.. 말씀을 받자.  주1)

그래야 기도가 되어진다.

 

     '5만번 기도 응답'으로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도,

     그가 기도한 비결은, 기도만 한 게 아니라, 매일 성경을 깊이, 오래 읽은 데 있다.

     성경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히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그 받은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했던 것이다.

     그게 조지 뮬러의 기도의 비결이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한다.

 

▲은혜가 징계보다 더 크다.

대상17:장과 삼하7:장이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 비슷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 문구가 삼하7:장에만 나오고, 역대상 17:장에는 나오지 않는다.

 

대상17 :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사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삼하7:14~15,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는 다윗의 보좌를 이어서 왕이 될 자를,

하나님이 아들로 삼고, 그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죄를 지으면, 그 은혜를 거둘 수도 있다는데.. 즉 징계하시겠다는데,

 

즉, 사무엘하는, '징계하겠다'고 했는데, - 그래서 은혜의 조건성을 강조하는데,

반면에 역대상 17장은 '징계'란 언급이 안 나온다. - 은혜의 무조건성을 강조한다.

 

역대상 17장 본문에서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 이란 문구가 빠진 것은,

이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점이므로,

(역대상하의 기록시기가 바벨론 포로, 그 이후이다.)

 

이미 다윗 왕조가 죄를 범했고,

다윗의 왕조를 이은자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징계를 이겨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끝까지 붙잡아서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와 살게 하는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역대상하의 기록시기가)

역대상17장에는 그 징계의 문구가 빠진 것이다. 이미 징계도 받은 시점이다.

 

어쨌든 본문 역대상 17: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징계보다 더 크다는,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설령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 징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은총을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실제로 그 은총/은혜는 영원히 다윗 가문과 함께 하셨다.

      그 은혜의 언약은 영원한 것이다.

      오늘날 신약 성도인 우리도, 그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혹시 ‘저는 하나님의 징벌이 너무 무거워서, 하나님이 너무 두렵고,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라는 생각을 만약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때로 우리는 범죄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이스라엘도 70년이란 긴 세월을 징계 받았다.

그러나 (언약 아래 있는 성도들은) 그 징계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끝은 반드시 회복이요, 은혜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은혜

 

대상17: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대상17:17,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가 존귀하게 되었음을, 본문에서 2차례나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며 기도드린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기가 존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평가self esteem가 높아졌다.

어디까지 높아졌는가 하면,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까지 높아지고, 존귀해졌다.

 

꼭 자기 얼굴이 TV에 나와서 존귀하게 된 게 아니라, (그것도 좋지만)

꼭 자기 이름이 공개석상에 거론되어서 존귀하게 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마음에,

‘나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존귀함을 느낀다.

 

다윗만 그런 존귀함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 나도 다윗 같은 존귀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찬송드린다.

 

▲이렇게 그 은혜를 깨달으면.. 작아진다.

여기 오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축복의 말씀 앞에서 무한히 작아지는,

다윗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위에서 다윗이 은혜를 받아, 자기의 존귀함을 깨달았다고 했는데,

그래서 다윗이 교만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해졌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기를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상17 :18,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19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성전 건축과 다윗의 보좌가 영원함)을 알게 하셨나이다.

 

19절 말씀에 ‘큰 일’이라는 단어가 2번 나온다.

여기서 ‘큰 일’과 ‘주의 종’이 대비되고 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이다.

 

주님이 자기에게 이루신 모든 일은 ‘큰 일’이다. 두 번이나 나온다.

그러나 자기는 ‘종’이다. 아주 낮은 신분이다.

 

오늘날, 간혹 보면, 주께서 자기에게 큰 일을 이루셨다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큰 사람으로 자랑하는 자는.. 은혜를 잘 못 받은 사람이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도 크고, 주님이 큰 일도 자기에게 이루셨지만,

자기는 언제나 ‘종’으로 여긴다. 낮아진다. 이것이 참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앞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낮아짐이다.

 

     어쩌다가 한 두 번은 애교로 볼 수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습관적으로,

     내가 하나님 은혜로, 큰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주의 일을 크게 한다... 라며

     스스로 큰 사람이라고 홍보하는 분이 만약 있다면,

     그건 참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참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더없이 겸손해 진다.

     참 은혜를 못 받아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자기를 낮추게 되어 있지

     (본문의 다윗처럼) 자기를 높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녀를 끔찍이 배려하신다.

과거에 우리 부모님들 중에,

자기 자녀들에게 뭘 못해 줘서 안달인 부모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 팔아서 대학공부 시키고,

논 팔아서 결혼시키고,

반지 팔아서 손자손녀까지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요구함이 없이 절대 헌신적이었다.

 

이런 비슷한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죽도록 자기 백성들 뒷바라지만 하시고, 뭘 요구하는 게 없으시다.

 

①다윗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는 장막, 휘장 아래 계실 때,

‘내가 이스라엘 사사시대 부터 누구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해

백향목 집을 짓지 않느냐고 요구한 적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신다. 17 :4~6

 

②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들이 방황할 때 (출애굽~다윗이전까지 불안정한 시대)

그 불안의 시대와 혼돈의 시대,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지 않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이리 옮겨가면, 하나님도 따라서 이리 옮겨가시고,

백성들이 저리 옮겨가면, 하나님도 저리 옮겨가시면서 떠돌아다니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이리 저리 옮겨 다니셨다... 17:5

 

③너가 나를 위해서 집을 세우지 않고,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세워 주겠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왕조)을 세울지라.’  17:10                    주2)

 

우리 하나님은,

백성의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하나님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거기에 맞춰서 따라 가셨다.

(백성들이 힘든데, 백향목 성전을 지어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거기에 따라서 오히려 더 많은 배려를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배려해 주시는 은혜다.

다윗이 이 은혜를 깨달은 것이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그리고 한 번도 '성전 지어 바쳐라' 이렇게 요구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우리 부모님의 헌신에 못지 않은, 그 보다 더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다.  

우리가 뭘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먼저 그런 '나를 아끼시고, 배려하시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은혜를 감사드리자.

 

우리는 너무나 이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뭔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하고 큰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비로소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삶을 위대하고 존귀하게 하신다는 착각할 때가 있지만,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할 일은, 이런 배려하시는 은혜를.. 내가 깨닫고 깊이 감사하는 일이다. 

 

 

▲다윗의 미래, 후손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

다윗의 현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 이후의 미래까지, 다윗 이후에 그의 아들, 그 아들에 아들,

그래서 마침내 다윗의 마지막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모든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이 모든 미래를 보장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하는 원리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불평할 수도 없고, 원망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내 어떤 처지를 따질 수도 없다.

그 은혜와, 사랑과, 배려와. 우리를 존귀케 하심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니까!

 

▲이게 우리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놀라운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고,

이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계획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윗의/사람의 죄가 그것을 끊어내지 못하고, 중단시키지 못한다.

죄로 인하여 설령 연기가 되고, 징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 중단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주3) 

이런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을 감동시켰듯이)

오늘날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

 

 

◑3. 기도를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회복한다.

 

:20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

(오직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고, 다른 신은 없나이다... 유일신 신앙이다.)

 

:26 여호와여 오직 주는(주만)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여기서 유의할 점은,

본문은 다윗의 기도이지만,

역대기 상하가,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본문을 읽는 당시 이스라엘인 독자들은

역사적으로 크게 2번에 걸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했다.

한 번은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고,  :21

또 한 번은, 지금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이다. 이것은 바벨론 귀환자의 감격이다.

 

▲출애굽 이후 바벨론 포로 때까지 그 기간 약 6백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한 번도 깨끗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가 있었다.

 

그 죄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주변 나라의 우상도 섬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6백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만을 섬긴 적도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이나 아세라 등 다른 우상들을 동시에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동안

그야말로 풀무불에 던져진 것 같은 고난과 연단을 받은 후에,

그 결과 포로에서 귀환하고 나서부터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또다시 외적으로 우상을 섬긴 일은 없었다. 우상에 확 데었다고 할까?

(물론 나중에 끝에 가서 과도한 율법주의, 형식주의로 흐르기는 했지만, 예수님 당시)

 

포로 귀환 후에는,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섬겨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놀랍게 부각되는 것이,

그야말로 이제는 실감되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저절로 고백되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 - 이게 참 신앙의 절정이다.

우리 신앙이 순수하지 못할 때는,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여기 쳐다보고 저기 쳐다보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믿지만, 돈도 있어야 되고, 쾌락과 다른 어떤 것도 있어야 되고...

이렇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지만, 내게 부족함이 있으리로다..’ 하는 사람은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바벨론 포로 연단을 겪더라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후략)

 

 

..................................

 

주1)

기도와 말씀을, 보통 <열차와 레일 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열차는 레일이 있는 곳까지 달린다. 기도는 말씀이 있는 곳까지 간다.

 

기도가 있을 때, 말씀을 읽게 되고, 말씀을 읽을 때, 기도를 하게 된다.

반대로 기도가 안 될 때는, 말씀의 은혜가 작기 때문이고,

말씀의 은혜가 작은 이유는,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2)

사실 다윗 시대에 와서, 가나안 땅의 정복이 완성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자손이 많아지는 것,

이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들이

다윗이 왕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기까지

아브라함의 약속은 최종적으로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사사시대는 불안의 시대요, 혼돈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더 헌신하고, 더 목숨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겸손해 지셔서,

당신의 이동 중인 백성을 보살피는데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애정과 배려를 하셨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3)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특별히 강조한 신학자가 칼빈이요, 칼빈주의다.

다른 신학과 비교해서 굉장히 독특하고, 성경적인 신학적 관점이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범죄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도도히 흐른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매우 성경적이다. 다만 아무리 진리라도,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위험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이 90% 맞지만, 10% 예외적 진리(알미니안주의)도 성경에 드문드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10% 예외적 진리/말씀이 성경에 나온다고 해서

성경에 도도히 흐르는 90%의 진리(예정, 주권, 은혜, 견인)를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