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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교회라야 산다 / 찰스 프라이스

LNCK 2011. 7. 29. 12:00

◈다문화 교회라야 산다               행11:20~21            아래 설교 녹취

찰스 프라이스의 말씀강해 /A Dynamic or Dying Church

 

설교자 찰스 프라이스 목사는,

예루살렘 교회가 쇠퇴한 이유, 반대로 안디옥 교회가 부흥한 이유를

가장 근본적으로 ‘유대 전통 고수 교회’와 ‘다문화 수용/융합 교회’의 차이로 밝힌다.

 

사람의 본성, 자연적인 경향은,

언제나 자기 혈연, 자기 민족, 자기 문화적 국수주의(배타주의)로 흐르기 때문에,

여간 애쓰지 않고는, ‘다문화 수용/융합 교회’가 되지 못하여,

결국 쇠퇴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을... 이 설교는 함의하고 있다.    *함의:뜻이 들어 있음 

 

이것은 사회 발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대인이 사도바울을 반대한 이유

 

▲바울이 이방인을 교회로 끌어 들였기 때문이었다.

사도바울(이하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반대를 받았는데,

그를 반대하는 주체 세력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거나,

또는 유대전통 속에서 기독교를 믿는 소위 ‘유대-기독교인’들이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약 2년간 투옥       행24~26장

그리고 로마 감옥으로 호송되어 약 2년 투옥    행28:30

그 와중에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시간까지 합하면 

약 5년을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 하게 된다.   이때 옥중서신 기록

 

물론 그가 전도여행중에 가는 도시들마다 반대를 받은 것까지 합치면,

더 긴 세월이 되겠지만..

어쨌든 유대인들 때문에, 가는 곳곳마다 반대/핍박/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그 아깝고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가

동족 유대인들의 반대로 인해, 많이 허비되고 만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지만..

 

     문제는, 그 반대 세력 가운데는, 기독교인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행1~7장까지 예루살렘 부흥의 주인공들이었다.

 

     한때 찬란한 역사로 성경에 기록된 행1~7장에

     이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계속 반대하고, 핍박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기독교를 믿었지만, 유대교 전통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유대 선민주의를 고수하면서, 기독교를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믿고,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이방인들을 전도하고 다니니까,

     바울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은, 그런 배타적, 국수주의적 예루살렘 기독교는.. 망하고 말았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신학적 특수성의 한계를 고수하고, 그 외는 모두 배타적으로 보며,   모든 신학이 다 그럴 수 있다.

어떤 교단적 특수성의 경계를 고수하고, 그 외는 모두 열등하게 보며,   모든 교단이 다 그럴 수 있다.

어떤 민족적, 문화적 경계를 고수하고, 그 외는 다 어울리기 싫어하며,   단일 민족이 특히 심하다.

어떤 교제권의 범위를 한정하고, 그 외는 모조리 경쟁대상으로 볼 수 있다.   '패거리 문화'라 그런다.

 

이 설교문의 원제목은 Dying or Dynamic Church이다.

‘죽는 교회가 될 것인가? 살아서 역동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이다.

 

그게 뭐든지.. 신학/교단/민족/문화/교제권의 범위를 나름대로 규정해 놓고,

배타적으로 나아가면,

결국 Dying Church가 되고 만다는.. 찰스 프라이스 목사의 혜안이다.

 

일부러 고의적으로 나쁜 목적을 갖고, 그렇게 나아가는 게 아니라,

사람은 자연적/자동적으로.. 배타적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게 사는데 여러 모로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처럼 Dynamic Church가 되려면,

     경계 바깥의 사람과 문화를 수용하는,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딜레마

그들은, 복음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그 후에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고,

그 후에 선지자를 통해, 율법을 해석해 주셨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복음의 예언을 성취, 종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선민으로 선택되었고,

할례와 안식일과 율법의 규례를 지키며, 전통적으로 충실히 믿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방인이 끼어드니까, 불청객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도 이미 이방인들이 구원 받을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 행15장에

예루살렘에서 공의회가 열려서, 사도들에 의해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결되긴 했지만,

 

수 천 년 동안 오랜 유대문화적 전통에 절어서 살아왔던

일부 아니 다수  ‘유대-기독교인’들에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딜레마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약 당시 ‘유대-기독교인’으로 살았더라면..,

그 때 당시에 우리가 안 살았던 것이 큰 다행이다.

 

 

◑융합적, 수용적이 되어야, 복음화가 일어난다.  ↔배타적

 

▲어쨌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세계복음화 계획을 시행해 나가신다.

행1:8절의 명령이

행7장이 끝날 무렵까지 전혀 시행되지 않자,

베드로가 주일 오전 설교하고, 요한이 저녁 설교하고,

야고보가 청년회 인도하고, 마리아가 여선교회 인도하고,

빌립이 남선교회 인도하느라 바빴지만...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안에서 이었다.

 

그러자 주님은 ‘직권’으로             *시중에서 주권이란 말은 안 쓰고, 대신 직권이란 말을 쓴다.

행8:1에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을 흩으셨다.         의장 직권으로 뭘 상정했다.. 등

 

예를 들면, 아마 서구의 백인 기독교인들은,

동양인/남미인/아프리카인이 기독교의 주류가 되는 것이

탐탁치 못할 수도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인구가 엄청 많은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주도권을 갖게 되는 것을

어안이 벙벙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직권으로)

세계복음화를 선포하셨고,   행1:8, 마28:18~20등

주권적으로 그 일을 이루어나가셨다.    행8:1~

 

우리는 이런 역사와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개방과 융합이 없이, 우리가 편리한 대로 ‘우리끼리’ 하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좋은 날이 다 지나간 것’이었다.

결국은 중심축center이 안디옥으로 옮겨져 버렸으니까.

 

▲편한 것을.. 극복해야 한다.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서로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다.

 

같은 언어를 썼고, 같은 문화적 동질성에다, 같은 피부색을 갖고 있었다.

그들끼리는 서로 편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유가,

‘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을 것이다.

 

신앙도 신앙이지만,

언어, 배경, 문화, 음식, 이런 모든 것이 다르니까..

교회에서 서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과거부터 ‘개’로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 이방인들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굉장한 불쾌감과 불편함을 주었을 것이다.

 

과거에 한국에도 양반과, 상놈과 백정이 함께 예배드리던 것이,

문화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의 정신으로 쉽게 극복했다.

만약 그때 그걸 극복 못했으면, 그때 곧 Dying Church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저 Charles Price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목사가 있고, 반대로 비호감 목사도 있다.

그런 개인적 성향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공동체적으로 발전하고, Dynamic Church가 되려면,

언제나 나와 반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들과 융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Dying Church가 되고 말 것이다.

 

     장로교는 오순절파와 교제해야 하며,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웨슬리안과 서로 보완적이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전통은, 다른 기독교 전통과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

           안 그러고 외국 교회에 부정적, 배타적으로 나아가면.. Dying Church가 되고 만다.

 

교회 역사를 보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저지르는 실수는

교회가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다가,

결국 사교클럽처럼 되고, 결국 Dying Church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새신자가 가서, 그 교회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그 교회에 토착화된 ‘인적 교제권’이, 개방되고 융합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원치 않았지만, 결국 사교클럽처럼 되고, Dying Church로 귀결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편한 가운데, 자기들끼리 서로 정답고 친한 것이다.

그 가운데 점점 사명(지상명령)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전도가 되어, 누가 새로 들어오면, 또 관계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행21장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니까,  (3차전도여행을 끝마칠 무렵에)

예루살렘 교회는, 또 율법적-유대교적 기독교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또 핍박을 받아야 했다.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수용’을 결의했지만,

수년이 지나서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교 전통의 기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면서, 물갈이가 되어야 한다.

국내외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Dynamic Church로 나아가는 길이다.

타인/이방인/다른 사람들과 융합과 수용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잠시 안디옥 교회에 들어온 ‘새로운 피’를 살펴보자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의 면면을 보면, 행13:1~2

 

     바나바 - ‘구브로’ 출신의 해외파(헬라파) 유대인이다.    *구브로는 지중해의 섬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는 오늘날 말로 ‘니그로’이다.   아프리카 흑인이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 -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루기오는 아랍인일 가능성.

     헤롯과 함께 자란 마나엔 - 아마 유대인 또는 유대계 고위층.

     사울 - 소아시아(터키) 다소 출신 유대인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이들이 융합된 ‘코스모폴리탄 교회’였다.

          이것이 바로 배타적인 예루살렘 교회와, 결정적인 차이였다.

        

▲캐나다 터론토에 있는 저희 Peoples Church는

아예 시작부터 이런 ‘다민족, 다문화 교회’를 목표로 삼고 달려왔다.

 

이 도시 Toronto가 다민족이 융합된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느 특정 민족, 인종(예를 들면 백인) 교회의 색깔을 버리고,

모든 민족, 모든 계층, 모든 인종을 적극 수용한 결과,

 

지금 우리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쓰는 언어는

영어를 제외하고 모두 74가지 인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놀랍게 여기며,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편리를 추구할 것인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편하고, 편리한 것을 추구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Dying Church,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겉껍질만 남게 된다.

 

국내외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면,

반드시 불편함이 생기게 된다. 우리 끼리의 편리함이 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Dynamic Church가 되고, 생명력이 유지된다.

 

나 자신의 불편함, 기득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주님이 알아서 이끌어 가신다.

‘나 없으면 안 되겠지.. 나 아니면 큰 일 나겠지’

그 사람이 바로 ‘큰일 낼’ 사람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실 줄 믿고,

목회자와 지도자는 교회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내려놓고, 선교 떠났다.

선교사도 선교지 교회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아니다. 반드시 교회는 살아난다. 아니, 더 잘 된다.

그래야 교회가 융합되고, 활기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