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카푸치노, 즐기지 말자 욘3:1~10 11.08.10. 설교스크랩
보통 소설가들이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데요.. 흥미롭습니다.
▲카푸치노 커피에는 하얀 거품이 있습니다.
카푸치노 커피.. 커피에 하얀 우유거품을 얹고, 거기에 계피가루를 뿌려서
입술에 하얀 거품을 잔뜩 묻혀가면서 마시는 커피 입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 또는 신앙에서 감정을
마치 카푸치노 커피의 거품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둘 다 ‘부글부글 끓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커피 카푸치노를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마는
만약 신자가, 신앙적으로 말해 감정의 카푸치노를 즐기면
이게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도.. 아름답게 사용되어 지면 좋습니다만..
특별히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하는 분들에게는
감정이입, 감정투사,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이게 필수입니다.
예술은.. 감정을 아름답게 잘 사용하는 기술입니다.
감정도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내 감정’이 내 속에 계신 주님의 감정을 대변하는 쪽으로 표현되면.. 좋지만..
‘내 감정’이 내 육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쪽으로 만약 표현된다면.. 좋지 않으니까..
그 감정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
▲사실 fact에 대해.. 내 감정적 반응을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거품’을 즐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카푸치노 커피처럼 그 ‘자기 감정의 거품’도.. 사람이 즐길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자기 스스로 빠져들고, 지나치게 몰입되는 것이지요.
자녀의 성적이 안 좋다는 사실과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감정은.. 꼭 그것이 일치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 성적이 안 좋은 것 때문에.. 내가 꼭 기분이 나빠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감정이라는 거품을 그 위에 얹어서 받아들이며
마치 카푸치노를 즐기듯이.. 그 감정의 거품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자기 감정의 카푸치노를 즐긴 요나
▲요나서의 특징.. 감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나서가 다른 예언서와 구분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과, 요나의 감정이,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며 유지되고 있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 계속해서..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바다 밑 심연 속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니느웨로 방향을 돌리고
하나님이 전하라는 심판의 예언을 전하기까지는 합니다마는
그 마음의 감정은 어찌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립하고
그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욘4장에 보면, 요나가 분노하게 됩니다. 감정이 폭발해버립니다.
이 감정의 대립을.. 요나서가 아주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고, 그것이 요나서의 특징입니다.
▲요나서의 주제
여러분, 요나서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감정의 대립을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는 이 이유가 뭘까요?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 하면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분이 나빠지느냐? 기분 나쁘게 살지 마라!’
이 얘깁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핵심주제 중 한 가지가 될 것입니다.
원래 요나서의 주제는,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 한계에 갇혀있는 신앙의 벽을 깨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신다는.. 이런 선교신학적인 주제입니다.
그건 민족적,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렇고,
요나서를 나 개인 인격적 측면에서 그 주제를 살펴보면
‘네 감정을 잘 다스려라. 네 감정에 스스로 너무 빠져들지 말라’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기분 좋게 살아갑니까?
감정의 거품을 즐기지 말아야 됩니다.
감정의 거품 속에 빠지는 이 습성을 제거해야 됩니다.
이 습성이, 죄악 된 습성이라는 거예요.
감정의 거품 속에 빠지는 이 습성을 제거해야 됩니다.
▲베드로와 요나의 비교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 이후에 첫 번째 행한 설교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 명이 회개를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3천 명 회개사건은, 요나에 비하면 아주 초라합니다.
요나가 설교하자, 하루에 12만 명이 회개한 거예요.. 니느웨 성의 12만 명이.
그런데 이 요나가 어떤 요나입니까?
니느웨 성은, 사람이 부지런히 걸어서 3일만에야
그 성을 가로지를 수 있는 아주 큰 성입니다.
그런데 하룻길만 행하면서
‘40일 뒤에 망할 것이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욘3:4
이게 뭘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 나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명 다 감당했어요.’ 하고 빠져나온 거예요.
사흘길이 걸리는 성읍이면
적어도 사흘은 걸으면서 전해야 골고루 퍼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만 선포하고선 싹 빠져나온 겁니다.
이런 요나의 마음은, 욘4장을 읽으면 아주 정확하게 나타납니다만
여전히 ‘망했으면 좋겠어요.’ 하는 심보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의 깊음 속에서 고통을 치르게 하시면서, 요나의 방향을 꺾었기 때문에
와서 전하기는 합니다마는, 여전히 그의 마음은..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입니다.
그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어요.
그 감정의 거품 위에, 그대로 자기의 마음이 얹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 감정의 거품을.. 요나는 즐기고 있는 거예요.
마치 카푸치노 커피의 거품을 우리가 즐기듯이 말입니다.
요나를 보세요.
사명감에 투철한 것도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죽었으면 좋겠고,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삼일 길을 걸으며 설교해야 될 그 상황에서
하룻길만 마지못해서 설교한 다음에 싹 빠져나와서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니느웨 성의 12만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다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립니다.
이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뭐 상식을 초월해서 나타난 결과요, 열매입니다.
열심히 금식하며 목청이 터져라 외쳐도.. 한 명도 회개 안 하기도 하는데,
그냥 대충 대충 ‘너희들 망해버려라’는 심정으로 설교하는데도..
12만명이 회개했습니다.
▲요나와 다른 선지자와의 비교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에스겔,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서 민족의 영적 부패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돌아왔어요. 아무도 안 돌아오고 다 멸망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자기 동족이, 그렇게 거의 아무도 안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라의 원수 민족의 원수인 나라에 가서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성도 정열도 없이 마지못해서
3일 해야 될 것을, 단 하루만 설교를 했는데.. 12만 명이 모두 돌이킨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 요나서 본문을 통해 가르쳐 주시려는 게 뭐예요?
◑교훈 및 적용
▲1.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요나는.. 자기 성질 팍팍 다 내면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전대미문의 역사가 일어났고,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에스겔,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서 민족의 영적 부패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언했는데도..
크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열심으로 따진다면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에스겔, 예레미야가.. 더 열심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요나는.. 니느웨에서.. 정말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그런 요나의 업적을 칭찬하셨을 정도입니다.
마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눈물 흘리며, 뜨거운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감정보다, 주님의 주권에 따라 행하십니다.
▲2. 너무 필요 이상으로, 자기 감정을 즐기지 맙시다.
물론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안타까움과 눈물은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일치된 것이었습니다.
일치될 때는 그렇게 슬퍼하면 되겠지마는..
요나처럼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긍휼히 여기고 계시는데
자기는.. 원수가 망하기를 원하고 있는 싫어하는 감정의 거품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과 대항하게 되고, 하나님과 싸우게 되고
내 인생의 하루하루 전체는 기분이 나쁜 날로 점철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감정의 거품입니다.
자기 감정의 카푸치노를 즐기지 마세요!
▲3.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감정을 조절합니다.
12살짜리 알렉산더가 부케팔로스(사나운 말)를 태양을 향해 서게 했을 때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경악하여 날뛰던 그 부케팔로스가.. 온순해졌습니다.
시커먼 자기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도 태양(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자기 그림자 (문제)를 안 봅니다.
현재 난리가 난 이 상황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의 시선과 방향을 돌려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느끼는 마음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으로.. 내가 (감정이입 되어) 느껴야지..
요나처럼 내 감정으로.. 내가 느끼고 즐기는 것은..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분노든지/슬픔이든지/기쁨이든지..
내 감정을 거기다 얹지 마세요! 거품을 얹지 마세요!
대신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로마식민지 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민족을 식민지화 하고 있는 로마에 대해서
당신의 감정을 거품으로 만들어 얹어서 카푸치노로 드시지 않아요.
오직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로마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삼백 년 뒤에 로마를 기독교국가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아요?
로마에 저항하고, 로마에 반대하고, 로마를 미워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대로 싸우게 하지 않게 하시고,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이 그렇지를 않아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고 계시고,
하나님의 감정과 마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로마가 기독교에 먹혀버렸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의 문제, 가정의 문제, 돈 문제, 이걸 카푸치노로 만들지 마세요!
내 감정의 거품을 거기다 얹지 마세요.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계속 기분 나쁘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면,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면 하나님의 감정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반응하시고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는 겁니다.
▲4. 이 요나는 보통 우리 인간과 똑같아요.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요나보다 났습니까?
원수가 망하기를 좋아하는 게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대로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내 자식의 문제를 보고
일반인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을
따라서 가지 말라는 거예요. 카푸치노를 즐기지 말라는 거예요.
왜 우리의 감정의 거품을 얹어서, 그것을 즐기려고 합니까?
왜 그 감정에 빠져버립니까?
안 된다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 모두의 감정의 거품을 싹 거두어 버려요.
우리는 부케팔로스 말처럼.. 태양(하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등지고 있는 이 세상일들에 대해서 느끼시는 감정을,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성령을 통해 느끼게 해주시면서,
이제, 하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의 희노애락과 나의 희노애락이 각도를 같이 하고 리듬을 같이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이에요.
내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감정의 거품으로부터 빠져나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감정과 일치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것이 십자가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은 리듬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 우는 여자들을 보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보고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슬퍼하는 이유가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기뻐하는 이유가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나는 슬퍼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일을.. 나는 기뻐하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그러니 기분이 평소에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의 기분과 다른 것은.. 내 기분이 잘못된 거예요.
자, 이제 내 감정의 카푸치노 .. 그만 즐깁시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의 역사와 겉돌아요.
요나가 니느웨를 아무리 싫어해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주권)이 그들을 구원하시려 했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소용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과도 같이 싸우게 되며,
4장에 가보면 요나의 기분 나쁨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기분이 나빠서 미쳐버립니다.
왜 이렇게 살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기분이 나쁘게 산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의 카푸치노,
이제는 더 이상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과 대상과 일들과 사건에 얹어서,
내 감정의 거품에 얹어서 거기에 빠지며
그 맛에서 허덕거리는 일을 중단하는 참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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