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은, 모든 세상 철학을 반박합니다.
이 시간 저는 우선 여러분들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자기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원래 ‘철학 philosophy’ 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인데,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위하여, 답을 찾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시대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고,
그걸 대중 매체를 통하여, 마치 폭격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퍼뜨려서,
우리의 생각을 혼돈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창세기 1장을 믿는다면,
그 성경의 첫 페이지로도, 능히 수많은 철학적 견해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철학적 견해들을 목록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는 매번 무슨 ‘교리’ 또는 무슨 ‘주의’ 할 때마다 머리가 아픕니다.
저는 오직 ‘ism’끝나는 단어는, 단 두 개만 좋아 합니다.
바로 [침례 baptism] 와 [전도 evangelism]입니다.
그 외 모든 -ism은 오류가 많습니다.
1)무신론 Atheism
예를 들면, 당신이 만일 창세기1장을 믿는다면, 무신론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무신론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신이 없다’고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모순이지요)
2) 불가지론 Agnostic
창세기 1장은 하나님에 대한 ‘불가지론’도 부인합니다.
‘불가지론’이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모르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1장을 믿으면, 하나님에 대한 불가지론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3) 정령숭배 Animism
Animism은 말하기를, 자연의 모든 물체에, 많은 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강에는 강의 신, 산에는 산의 영이 있고, 나무에도 영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많은 민족의, 많은 사람들이 정령숭배사상을 믿습니다.
창세기 1장은, 정령숭배사상을 배격합니다.
4) 다신교 Polytheism 는 이 세상에 여러, 수많은 신이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이 논점을 부인합니다.
5) 이원론 Dualism은 두 분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한분은 선하신 하나님. 한분은 악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은 좋은 일을, 악하신 하나님은 나쁜 일을 책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관점이 아닙니다.
6) 일신론 Monotheism은,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입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는 일신론을 믿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엘로힘’은 ‘복수’입니다.
즉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일신론이 아닙니다.
7) 이신론 Deism (이성적 신)은, 하나님이 우주를 지었음을 믿으나,
오늘날 그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치 시계에 밥을 준 후, 시계가 자연적으로 돌아가듯이,
더 이상 신의 기적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신론은 교회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날씨도 주관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신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으나, (지금은 주무시고 계시며)
현실의 우주나 세상을 다스리지는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8) 유신론 Theism (또는 인격신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창조한 만물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유신론은 성경의 관점과 아주 유사합니다.
9) 실존주의 Existentialism 는, ‘자기 경험’이, 자기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마치 ‘신’처럼 중요시여기고, 떠받든다는 점에서,
이 사상도 일종의 종교입니다.
10) 인본주의 Humanism 은,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11) 이성주의 Rationalism은, 이성을 하나님이라고 믿으며,
12) 유물론 Materialism은, 물질만이 진짜고, 믿을만 하다고 믿습니다.
13) 신비론Mysticism은 오직 영적 세계만이 진실하다고 믿으며,
14) 일원론 Monism은 좀 웃기지만, 오늘날 아주 유행입니다.
일원론은 물질과 영혼은 본질상 ‘하나’라고 합니다.
15) 범신론 Pantheism은 ‘만물이 신’이라 하고,
범신론을 현대말로 만유신론Panentheism이라고 합니다.
이는 신은 모든 물체 속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위에서 말씀드린 모든 논점들을 부인합니다.
만약 당신이 오직 한 가지 논점으로 성경의 관점을 귀납한다면,
바로 삼위일체론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며, 우주의 주재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관점입니다.
이 사상이 창1장부터~ 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이런 관점이 계속됩니다.
◑창세기 천지창조 기사의 특징은, “간단 명료”입니다.
이제 여러분, 이런 지식적인 이론들을 그만 살피고,
우리 함께 창세기 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창세기1장은, 과학적 용어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같은 과학시대도,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창1장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 공식을, 어디서 구해왔는데요,
만약 뒤에서 안 보이는 분은, 나중에 비디오를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1: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란 (간단한) 공식 후에, ‘빛이 생겼습니다.’
이 수학 공식은 아주 복잡합니다. 이는 ‘빛의 수학공식’이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창세기 1장은 과학적 용어(복합한 공식)로 씌어지지 않았음에 감사드립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겨우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낱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를 들면, 그 중에 식물에 대한 언급은 세 가지 종류로만 언급합니다.
풀/ 채소/ 나무, grass, plants, trees
여러분 이렇게 식물을 분별하니 아주 간단하죠.
우리는 누구나 풀/ 채소/ 나무를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 창세기1장은 동물에 대한 언급도 세 종류로만 언급합니다.
가축/ 사람이 사냥하여 먹을 수 있는 동물/ 야수. 등으로만 언급합니다.
이런 간단한 분류법은 우리 중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 가지 종류의 식물, 세 가지 종류의 동물,
이렇게 구분한 기준은, “그것들과 사람의 관계”를 기준으로 분류했습니다.
창세기 천지창조가 ‘간단명료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면에서입니다.
▲창세기1장에 모든 글은, 76개의 히브리어 어근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창세기 1장은 매우 쉽게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1장의 76개 히브리 단어는, 세상의 모든 민족의 언어 속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1장은, 성경 66권 중에서, 제일 쉽게 번역할 수 있는 장章입니다.
오직 최고 지혜로운 사람만이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세상의 작가, 소설가와 같습니다.
작가는, 우선 잠재적 독자가 누구냐를 고려한 다음,
그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는 보통 ‘안개지수 foggy index’를 통하여, 자기의 글의 결과를 예상합니다.
즉 문장의 수(글의 길이)와, 어떤 (어렵거나/쉬운) 단어를 사용했는가..
이런 데이터를 수학공식으로 계산하여
그 결과로,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의 책을 읽게 될 것인가를 예측하게 되죠.
잡지나 논문도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을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를 읽은 수준의 사람이 이 글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과학 논문 잡지 정도를 읽는 사람이, 이 글을 읽을 것인가,
그렇게 예상 독자를 산정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창조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창1장은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씌어져서
어린 아이들도 창세기 이야기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것은 쉽게 다른 언어로도 번역이 됩니다.
이는 아주 총명한 분만이, (그 복잡한 사건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쓸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찾아와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설명을 물었습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사람은, 뜨거운 난로 위에 1분 동안 앉아 있는 것이,
미녀와 한 시간 대화하는 것보다, 더 길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아주 총명한 사람만이 이런 간단한 해답을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단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 과학적 설명을 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기록했습니다.
◑천지창조의 구조
▲창1장에서, 하나님은 주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이 합하여 삼위일체를 이루십니다. 창1:1~3등
특히 성경은 기록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만들되..’
여기서 ‘만들되’ 동사는 아주 간단합니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창조’와 ‘제조’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창조]란 히브리원어에서 bara 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3번 나타나는데, (1, 21, 27절)
물질창조와, 생물과, 사람을 창조할 때 사용했습니다.
오직 이 세 가지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습니다.
그밖에 다른 곳에선 [제조 mad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히 ‘아사’ 1;7, 11, 12, 16...
바로 어떤 재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제조는 가능하나, 창조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의 중점입니다.
오직 세 가지만 하나님은 무에서 유로 창조하였습니다.
바로 물질과, 생물과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생명(DNA), 사람입니다.
matter, life(DNA), and man
(이제까지 주어 ‘하나님’을 살펴보았는데) 목적어도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첫날부터 일곱째 날. 매 절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의 주어, 하나의 동사와, 하나의 목적어로, 문법도 아주 간단하면서 직설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걸작입니다.
▲창세기1장의 구조는, 아주 명확하며 질서정연하여 육일로 나눕니다.
이 육일도 삼일씩 2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구조에 대해, 주목해보지 않았을 것이지만,
3일씩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땅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도 살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공허하고 혼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 3일 동안 (살 수 있는) 환경을 창조했습니다.
그 후에 후 3일 동안, 그 환경에 살 수 있는 생물을 창조했습니다.
전 삼일은 환경을 창조하고, 후 삼일은 생물을 창조하여
창조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단계별로 먼저 환경을 예비하고,
그 후 생물을 창조하여 그 환경에 거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첫 3일의 창조한 환경은, 서로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빛과 어둠(첫날),
-하늘과 바다(둘째 날),
-육지와 바다(셋째 날), 선명한 대비로 변화를 드러냅니다.
환경을 창조하신 후, 제3일에 그분은 식물을 창조합니다.
식물로 이 땅에 자라게 하십니다.
이제 태양과 달은, 앞서 창조된 빛 가운데 거합니다. 잠시 후 다시 해석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날, 그 배경으로) 빛과 흑암을 먼저 창조하시고,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창조해서, 빛과 흑암 중에 거하게 하십니다.
(둘째 날에) 바다에서 하늘이 만들어지고,
(다섯째 날에) 거기에 새가 충만하고, 바다에는 고기 떼가 충만하고,
(셋째 날에) 땅을 만드시고,
제6일에 땅에 동물과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누가
전3일과 후3일의 ‘대칭’을 주의해서 본 적이 있습니까?
오직 몇분만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질서정연하며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주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은 질서정연하며, 아주 정확하십니다.
그분은 무질서 chaos 중에서, 질서 order를 세우십니다.
이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숫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세 가지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영어로 번역한 후에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3,7,10 이라는 숫자입니다.
▲3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숫자이고, 7은 성경에서 완전수 perfect를 나타냅니다.
10은 ‘충분한, 많은 completeness’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이 세 숫자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3번에 걸쳐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고,
그분은 3번이나 이름으로 부르셨으며, (called 5, 8, 10절)
그분은 3번이나 제조하였으며, (made 7, 16, 25절)
그분은 3번이나 축복하였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영어로 번역 후에도
3이라는 숫자가 부단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1장에는 3이란 숫자가 정말 자주 나옵니다.
그 다음은 숫자 7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만족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7번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날의 수도 모두 7일, 이는 아주 선명합니다.
또한 1:1절의 히브리 원문은 일곱 단어입니다.
그리고 창조를 설명하는 세 구절도, 매 구절마다 히브리어 7단어로 되어 잇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일곱 단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바벨론 설화의 창조이야기와 강력한 대비를 이룹니다.
바벨론 창조 설화의 서술은 아주 “복잡”하면서 이상합니다.
만일 성경의 “간단명료한” 말씀과 대비한다면,
창세기의 진가를 즉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이어서 한 가지 문제를 깊이 다루겠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다시 한 번
창세기 1장은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하려 합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린이 동화 속에 집짓는 것을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동화는 아주 간단하게 써야 합니다.
-우선 벽돌을 쌓고,
-다음 목공이 창문과 문을 달고,
-그 다음에 지붕을 올리고,
-다음 배관기사가 와서 상하수도 관을 이어주고,
-그 다음에 전기기사가 와서 전선을 잇고,
-미장이가 와서 벽을 바르고,
-인테리어 기사가 와서 페인트를 칠하고,
마지막에 모든 사람은 휴식하게 됩니다.
만약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집짓는 것을 설명하자면,
아마 위 7단계로 간단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간략하기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실제로 건축에 참여한다면, 그건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간단하거나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실제로 건축을 할 때는,
반드시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벽돌과, 목공, 물과 전기수리공이 언제 와야 하는지에 계획을 세워야 하며,
어떤 때는 두 번씩 와야 합니다. 집을 짓은 것은 사실 아주 복잡합니다.
집을 짓는 건축가들은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은 창1장이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족합니다.
창세기의 서술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참으로 간단명료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창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문 건축가처럼)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창조를 알기 원합니다.
그분의 질서 있는 창조 역사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쉽게 쓰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렇게 쉽게 전한다면,
현대과학과 성경이 서로 대립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과학과 성경은 서로 대립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초자연적인 일에 대하여 경계심을 둡니다.
이는 과학은 오직 자연계만 연구하기 때문이며,
초자연적 영역은 연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초자연적인 일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일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실상 과학의 어떤 부분은, 창세기 창조의 서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과학과 성경이 조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중 어떤 문제는, 억지로 성경의 결함을 캐내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배꼽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참으로 황당한 문제입니다.
-또는 뱀은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왔습니까?
어느 날 런던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누군가 성공회 주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교는 대답하기를 ‘당신은 왜 남의 아내에 대해 그토록 흥미를 가집니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다른 재미나는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 ‘나무 좀벌레’도 같이 들어갔는가.
그 나무 좀벌레는, 암수 한 쌍이었는가?
그밖에 자주 묻는 질문 중, 성경은 왜 공룡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가?
이는 현대인들은 공룡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엄숙한 문제를 직면해야 합니다.
◑지구 생성 순서는, 성경과 과학이 일치합니다.
-예를 들면 창조의 속도에 대해, 지질학자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지구는 42억 5천만년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6일 동안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해결되어야 할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그밖에 지구의 연령과 창세기의 순서입니다.
▲신기한 것은 ‘창조 순서’에 있어서,
과학의 관점과, 창세기 1장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실은 예외지만, 이 부분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예외적 사실이란, 성경은 일월성신이 나타난 때를 제 4일,
식물(3일째)이 생긴 후로 봅니다.
(반면에 과학은, 일월성신이 식물보다 먼저라고 봅니다.)
태초에 지구는, 한 층의 두터운 구름층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사실 창세기2장은 온 지구가 구름층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과학도 이 부분에 대해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빛이 나타날 때, 마치 한 층의 구름같이 보였고,
그 후 식물이 나타났을 때 광합작용으로 지면의 안개가 사라지므로 인해
일월성신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월성신은 식물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단지 구름안개로 인해 가리워졌다가,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관점과 창세기 1장의 관점은 일치합니다.
또한 바다 생물은 육지보다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제일 나중에 나타납니다.
과학과 성경은 이 부분에서 아주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생성 순서에 있어서는, 성경과 과학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서로 일치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과학 사이에 문제가 있는데,
그건 동물과 사람의 기원에 대하여, 진화론이간 창조론인가?
그리고 홍수이전 사람들의 수명, 므두셀라가 969살까지 살았는데
수명이 가장 길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오래 산 것이 사실인가?
그밖에 ‘홍수의 범위가 정말 전 세계적이냐?’ 등의 문제들입니다.
불행한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창세기를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속엔 이러한 문제들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서두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먼저 창세기의 주제와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 후에 이 사소한 난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오직 창세기의 문제점만 다룬다면,
창세기의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난제들을 다루어야 하지만요.
◑먼저 우리는 <성경과 과학의 차이>를 살펴봐야 합니다.
세 가지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은
-부인 Repudiate
-분리 segregate
-통합 integrate 입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은 세 번째, ‘통합’ 입니다.
▲1. 부인 Repudiate
무지한 그리스도인은 첫 번째 방법으로 사람을 위협하여 선택하게 합니다.
성경이 옳든지 아니면 과학이 옳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합니다.
성경과 과학, 두 가지가 다 옳다고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선택은 아주 쉽습니다.
결과적으로 비그리스도인은 과학을,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 다, 모래 속에 자기 머리를 쳐 박는 짐승처럼,
다른 입장을, 절대 쳐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직면하지 아니하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과학적인 견해가 부분적인 면에서 정확합니다.
지금 이 강의시간에도 비디오카메라와 조명등 등, 과학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차를 타고 왔습니다.
짐 목사와 저는 이번 주 지속적으로 전화로 통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과학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전면적으로 과학을 부인하는 것은 오늘날 아주 미련한 짓입니다.
그렇다고 과학을 전면적으로 옳다고 믿는 입장도 똑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무조건 부인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며,
계속 하나만 옳다고 하는 것이나, 둘 중 하나만 맞다고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으로 믿음을 갖는데 방해하며,
사람으로 이성을 버려야만 성경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2. 분리 Segregate
둘째 방법은, 어떻게 하든지 과학과 성경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성경은, 각각 다른 분야에서, 변치 않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은, 물질세계와 자연계의 영역에서, 진리이지만,
성경은, 도덕과 초자연적 영역에서 진리이므로,
서로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절대 진리를 다룬다고 합니다.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언제 형성되었는가를 다루며
성경은, 누가 창조하였는가? 왜 창조하였는가를 다룬다고 합니다.
그래야 두 영역은, 서로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이상한 분리방법입니다.
현대인들은 말하기를 과학은 사실 fact 을 말하고,
성경은 가치 value 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실 fact 은 성경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며,
성경속에서 찾는 것은, 오직 가치 value 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아주 유행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자들도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이는 헬라사상에 불과합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헬라사상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물질과 영적세계를 분리하고, 성경과 세상을 분리하고,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리해 놓습니다.
이런 생각은 완전히 히브리 사상과 다릅니다.
히브리 사상은 하나님을 창조주(물질세계)와 동시에 구세주(영적 세계)로 보며,
물질세계와 영적세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방법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창세기 기사를 신화로 여기며
창세기 3장은 우화로 여기고
‘뱀이 어떻게 그 발을 잃었는가’ 이런 신화로 꾸며버립니다.
또는 아담은, 그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태초에 실존했던 한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꾸며낸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또한 우리 자신을
어떤 가치 value 로만 이해하게 하고
즉 신화로만 여겨지게 하고, 실제 역사로 믿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담과 하와를 신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역사적 사실은 아니며,
성경은 그 스토리 속에 도덕적인 진리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성경 전체를 읽을 때,
과연 어느 선에서 ‘역사적 사실’ 과 ‘신화’를 가려낼 수 있을까요?
(창세기부터 부인, 양보하면.. 계속 뒤로 끝이 없습니다. 모두 다 부인하게 됩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는 신화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 노아도 신화로 믿게 되고, 홍수사건은 다소 진실성은 보이나, 역시 도덕진리가 더 정확하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신화이며, 모세도 신화라고 합니다.
최근 방영된 ‘엑소더스’ 라는 TV 시리즈의 제작자는, 이를 신화로 여기고 제작했습니다.
그 스토리는 참으로 멋집니다.
그 TV시리즈에, 도덕적 교훈은 있어도, 역사적 사실은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갑니다.
그래서 심지어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신화로 보고,
하나의 진리를 포함한 이야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방법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 기사를 사실로 믿지 않으면, 그저 신화로 여긴다면,
과연 어디서 멈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못하고,
도덕적 교훈만 주는 책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성경을, 도덕적 가치관을 다루는 코란, 힌두교 베다,
등등의 경전들과 동등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견해는 성경을 파괴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 History는 하나님의 이야기 His story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 말했듯이 예수님은 창세기를 사실로 믿고,
복음서에서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적 관점’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리적 관점’은, 창세기의 난제를 풀기 위해,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3. 통합 Integrate은 맨 나중에 나오고, ▲2. 분리 Segregate에 대한 각론이 길게 이어집니다.)
◑과학은, 또한 신학은, 그 정설이 시대마다 바뀌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과 과학은 겹치는 영역이 있습니다.
똑같은 영역인데, 성경과 과학은 제각기 다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상반된 설명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주장의 상호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요?
우리는 두 가지 기본 핵심을 기억하면 됩니다.
▲1. 그 첫째는, 과학의 연구는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진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항상 부단히 변개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과학적 사실로 철석같이 믿었던 사실도,
지금은 더 이상 믿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원자가 우주에서 가장 작은 물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과학은, 그 원자 속에도, 전 우주가 통째로 들어갈 만큼,
끝없이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까지는 X, 또는 Y염색체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연구가 되어 지고 있고,
그 과거의 이론은 창문 밖에 던져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발전하는 과학 이론을 따라, 과학적 진리는 늘 바뀌고 있습니다.
DNA(유전자)의 발견은, 과거에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DNA에 대한 연구는, 그때의 초보적 연구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아주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DNA지도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DNA는 단순한 염색체의 조합이 아니고,
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되어지는 유전자 지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DNA는, 누군가 그것을 만든 인격(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연구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진리는 계속 바뀌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습니다.
지질학도 바뀌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타임지에서 과학전문기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쓰기를, 지금 지구 생성 연대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은
일곱 가지의 다양한 방식이 있으며, 과거의 ‘탄소14 반감기 측정법’ 말고도,
‘자기장 감소 측정법’ ‘해양 니켈 함유량 측정법’등이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구연대측정법으로 계산해 보니,
흥미롭게도 지구생성연대는, 가장 짧게는 9천년, 가장 길게는 약100,075년에 불과합니다.
과거처럼 42억5천만 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의견이 맞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과학자들이 더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발표할 때까지, 기다려봐야 합니다.
인류학 분야도, 지금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과거에는 선사시대 사람이,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생물이 과거에 나타났다가, 그들은 멸종되고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상이 아닙니다.)
생물학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지금 과학과 성경의 상반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살피는 중에)
첫째로, 과학적 진리는 항상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어느 시대의 과학에 자꾸 맞추려 하다가는,
그 다음 세대에는 (과학이 변할 때) 성경까지 던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성경과 과학의 상반성에 있어서 이 내용은 첫 번째와 똑같이 중요한데,
두 번째로, 전통적 성경해석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영감된 말씀이지만,
우리의 ‘해석’까지 영감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본문은 변치 않지만, 우리의 해석은 (과학처럼) 변화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땅의 네 모퉁이’를 말씀하는데요,
그래서 과거 사람들은, 지구를 사각체 또는 정사각체라고 잘못 해석했습니다.
성경은 그저 밖으로 드러난 모양을 묘사한 것입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하늘을 달린다’고요.
과거에 그 말씀을 보고서,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성경 해석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변치 않지만요!)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은, ‘묘사한 언어표현’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좀 더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실이 변화하듯이,
성경의 전통적 해석도 변화할 수 있다는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변치 않지만, 해석은 변할 수 있으므로, 전통적 해석도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1장에 나오는 ‘날’을 해석하는데, 5가지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제가 그 5가지를 다 설명드릴 테니까,
여러분은 가장 맞는 그 중 하나의 해석을 선택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6일만에 천지창조, 과학은 42억년만에 지구생성.. 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해결해야 되는데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는 ‘날’의 해석에 대해,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날’은 히브리어로는 ‘욤’인데요, 그 의미는 24시간의 하루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어떤 ‘시대’, 어떤 ‘지나간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 파슨은, ‘날’을 24시간 보다는, ‘어떤 지나간 기간’으로 봅니다.
이에 대한 5가지 해석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날’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지구의 하루, 즉 24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중간에 생략된 어떤 시간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주석서들을 보면, ‘그 생략된 시간’을 찾는데, 보통 3가지로 설명합니다.
1) 그 첫 번째는, 1장과 2절 사이에 갭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혹은 2절과 3절 사이에도 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지구는 ‘형태가 없이 아주 오래 동안 있었고,
그 갭 후에 6일을 창조했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스코필드 주석성경에 소개됨으로써, 널리 알려졌고, 다른 성경에도 그렇게 주석이 나옵니다.
그 후 6일동안의 창조는, 아주 오랜 기간의 혼돈(갭)이후에 되어졌다고 보는데,
아주 널리 알려진 이론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과학을 매치시키려 하는 거죠.
2) 성경의 연대와 과학의 연대를 일치시키려면 시간을 더 찾아내야 되는데,
홍수의 기간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책도 여러 권이 있는데,
그 중에 ‘위컴과 노리스’의 책이 가장 유명하고요,
지금 우리가 믿는 지질학적인 데이터는, 모두 노아의 홍수로부터 나온 것이랍니다.
홍수가 아주 길었다는 얘기지요.
3) 없어진 시간문제에 대한 가장 흥미를 유발하는 이론은,
하나님은 ‘골동품’을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가 몇 살이었을까요?
아기는 아이었겠죠? 그럼 30세 가량이었을까요?
그가 몇 살이든지, 가량 당시 누가 아담을 만나서
‘당신은 30세군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때 아담 나이는 ‘1시간 반’정도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골동품’을 창조하셨고(창조 당시 벌써 상당한 기간이 경과했음)
나무도 아주 새싹이 아니라, 나이테로 보면 200년 수령을 지닌 ‘골동품’ 나무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두 가능한 이론이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론이 나오는 이유는, 성경의 ‘날’을 ‘문자적 하루’로 볼 때,
과학이 말하는 오랜 세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를 연구하며, 생긴 이론들입니다.
이 이론들 중에,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지 상관없습니다.
▲2. 두 번째는, ‘날’을, ‘지질학적 한 연대 시기’로 해석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날’을 아주 긴 기간으로 보죠.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6일은, 그저 6일이 아니라, 6번의 지질학적 시대로 보는 이론입니다.
▲3. 세 번째는 신화적으로 ‘날’을 해석합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창세기 기사를 모두 완전한 신화로 보는 것입니다.
그 설명이 마치 시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신화로,
거기서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그 외 다른 것은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날’은, 그저 ‘동화속의 하루’입니다.
▲4. 또 흥미를 끄는 이론은, 런던 대학의 와이즈만 교수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그는 창세기에 ’날’이 나온 것은, 교육적인 목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데요.
창세기는 하나님이 계시하셔서, 모세가 썼는데,
그 교육 첫 날에 ‘이게 내가 한 것이다’라고 해서, 모세가 썼고,
다음날도 그렇게 했고, 그 다음날도 조금 더 들어서 썼고,
즉 7일은, ‘모세가 교육받은 기간’이라는 겁니다.
지금 잘 따라오고 계시죠? 이 이론도 2가지로 나뉩니다.
1)하나님이 모세에게 창조를 ‘말로’ 가르쳤다는 이론과
2) 요한계시록처럼, 하나님이 모세에게 ‘비전’으로 보여주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영상으로, 빛이 어둠에서 분리되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그 화면이 다시 캄캄해지고, 모세는 다시 다른 영상을 보았는데,
습기가 바다에서 분리되는 등의 그림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영상은, 식물과 동물들, 새들 등등..
모세가 그렇게 슬라이드 쇼를 보고서, 창세기를 기록했다는 거지요.
이 둘 중에 어떤 것이든지, 이 이론에서 ‘날’은
‘모세가 학교에서 교육받은 날/하루’라는 것입니다.
▲5. 마지막 (신학적) 해석은, 날을 ‘하나님의 하루’로 봅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시간은 하나님께도 상대적이고, 우리에게도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보면, 천 날도 하나님께는 하루와 같으며,
하루도 천년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 창조를 일주일만에 끝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시간으로 본 일주일이고요,
그걸 지금 인간의 지질학적 연대로 계산하려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오벨리스크, 바늘모양의 높은 탑)’이 있지요.
만약 당신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높은 탑)이 ‘우리 지구의 연대’를 나타낸다고 가정하면,
인간의 전 (선사+역사) 시대는, 마치 그 위에 동전 하나를 엊어놓는 것처럼 대단히 짧습니다.
그 인간 역사 중에서, 또 문명의 역사는, 그 위에 마치 우표 한 장(두께)을
얹어 놓은 것처럼, 더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과학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일주일 만에 완성하셨지만,
시간은 상대적이라서, 그게 우리에게 1주일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게 ‘날’에 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일곱째 날에 있어서, ‘날’의 길이를 주의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오랜 세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내내가 일곱째 날입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부활절에, 예수님이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구약 내내 새롭게 창조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1장 천지창조 때, 창조작업은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새롭게’라는 단어는, 구약에 단 한 번 빼고는, 안 나옵니다.
그 한번은, 전도서입니다. “보라, 해아래 새 것이 없도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약 내내 안식하셨습니다.
꽤 긴 기간이지요?
그런데 ‘날’에 대해, 5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무슨 주장을 하려는지, 여러분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네 저는 그 사실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1주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날’에 대한 해석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꼭 24시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인 하루’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날’을 보는 해석입니다.
창조를 1주일 만에 하신 것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1주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난 2천년도, 단 이틀 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시간은 존재하지만, 상대적이지, 우리처럼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한 예를 들었는데요, 저는 진화론의 큰 질문에 대해,
특히 사람의 진화에 대해, 이 시간에 다 대답하지 않고,
다음 시간에 또 살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때로는 좀 유연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과학자들 역시 겸손하게, 과학적 사실을 주장하거나,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어떤 과학적 원리가 새롭게 발견되어질 때마다,
그것이 단순한 인과율(자연법칙)으로 인해 설명되어지지 않으므로,
과학자들도 그 사고가 더 유연해지고, 자세도 겸손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조간신문에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증명하려는가?” 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저는 그 기사의 제목만 보고서도 놀라워했습니다.
왜냐하면 1백 년 전에는, “과학이 증명 못 한다”가 대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를 더 연구하다보니, 우주와 세상은, 하나님이라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개입되어졌다는 사실이, 예전보다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연일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과학과 성경해석은 계속 둘 다 변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3. 통합 Integrate
과학과 성경의 상반된 진리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무시’, ‘분리’가 아닌) ‘통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성경, 둘 다 모두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하며,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 대한 많은 진리들을, 우리를 위해 발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인간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진리들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으며,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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