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있다 욥27:1~12 15.10.11.출처
▲요즘 꽤 인기 높은 텔레비전 연예프로 중에 ‘진짜 사나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는 그 중에서도 ‘여군 특집’이 특히 재미있습니다.
그 ‘여군 특집’이 총 3편에 걸쳐 방영되는 동안 나왔던 출연자들 중에 김소연은
텔레비전의 인기 연속극을 통해서 ‘여전사’의 이미지로 잘 알려진 유명한 여배우였는데,
웬걸 훈련소 첫날에 체력 테스트를 해 보니 그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팔굽혀 펴기’를 단 한 개도 못할 정도로 출연자들 중에 가장 허약체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최악의 약골이 힘든 군사기초훈련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육체적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이는 부사관 훈련과정을 다 감당해 내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격적인 훈련이 진행되면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루 이틀도 버티기 힘들어 보였던 그 김소연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오히려 점점 더 우수한 훈련병으로 진보하더니
끝내 전 과정을 완전히 이수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그녀의 ‘정신력’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마녀 소대장’이라는 악명(?) 높은 소대장이
훈련소의 수료식을 마친 후에 작별인사를 할 때에도
“내가 볼 때에 해내겠다는 정신력만큼은 김소연 훈련병이 가장 우수했던 것 같아.”
라고 특별히 칭찬했을 정도로 그녀는, 군대 용어를 빌리자면,
순전히 ‘악으로, 깡으로’ 그 모든 육체적 시련을 이겨내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욥 역시 그런 ‘내면의 힘’으로써
자신이 당한 환난과 싸우고 있었는데,
욥 자신은 그 힘을 가리켜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타로 들이닥치는 환난으로 인하여
욥의 육신적인 힘이 완전히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바로 그 ‘하나님의 기운’이 욥의 심령 속에서부터
실로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기운’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바로 사람을 ‘생령’이 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본문 욥기 27장에서는 세 친구들에 대한 욥의 마지막 답변이 시작됩니다.
욥의 그 세 친구들은 그처럼 끔찍한 환난에 빠진 욥을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는커녕 거의 비난으로 일관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의 말들이 부분적으로는 옳은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다 “욥 네가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은
뭔가 너 자신 쪽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너는 네가 저지른 죄를 인정해라.”
는 식의 일방적인 공박이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친구들로부터 그런 비난까지 듣는다는 것은
욥에게 실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으며
웬만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카운터펀치’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다운 직전’의 상황에 몰리면서도
욥은 마지막 불씨와 같은 정신력 아니 영력을 짜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운’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아무리 환난의 극한상황에까지 몰리더라도
이 ‘하나님의 기운’ 곧 ‘성령의 기운’이 남아 있는 신자는
과연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는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기운’이 있는 신자는 아무리 큰 환난 시험이 닥치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실에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1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1절에서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라고 했는데,
여기서 ‘비사’라고 번역된 말은 ‘잠언, 속담, 비유’ 등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이나 사상을 집약하여 결론적인 교훈을 비유로 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2절.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말은
‘나의 권리(right)를 빼앗으신 하나님’이란 뜻으로서,
욥이 자신이 당한 억울한 처지에 대하여
항변할 권리마저 하나님께서 박탈해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욥기의 앞장들에서 나타나듯이, 욥은 자기의 억울한 처지를
하나님 앞에 친히 나아가서 하소연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 친구들 앞에서조차, 그 어떤 자기변호도 통하지 않는 답답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아무리 용의자나 피고인이라 해도
최소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는 법인데,
욥은 지금 마치 그 마지막 권리까지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 버리신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욥에게는 그것이 마치 전능자께서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시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욥이 여기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의 처사가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본인 스스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이 전혀 없는데
이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니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욥이 자신의 항변에 대해서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괴롭게’ 하고는 계시지만
바로 그 하나님만이 또한 자기의 진실함을 ‘인정해’ 주시는 증인이시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숨결, 바람, 루아흐, spirit)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심을 인정해 주실 것을 의지하면서
욥은 실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것이 곧 3절에서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욥은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생명이 그 속에 완전히 있는’, 즉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 생명이 이어지기를 그 누가 바라겠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왓장으로 온 몸을 벅벅 긁어대면서 사는 것이, 어디 사람 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욥이 곧 이어서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그처럼 당장 죽느니보다 더 못해 보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자기 생명을 두고
3b절에서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이자, 주제
여기서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불어 넣어주신 ‘생기’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에 그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 넣어짐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 “코”에 바로 그 ‘하나님의 생기’가 아직도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의 생명은 외면적으로만 보면
너무나 비참하고 절망적으로 여겨져도
실상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운’을 통해
자기 생명을 계속 연장시켜 주고 계신다고,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지금 욥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바로 그런 까닭에 욥은 그 다음의 4절에서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고 단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호흡과 맥박을 가지고 아직도 살고 있으니,
그런 생명의 기운으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가지고
그 어떤 불의를 말하거나 궤휼을 발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5절.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자기 친구들뿐 아니라
그 누구 앞에서도 신앙 양심에 부끄러울 것 없이 순전하게 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6절.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다음 절에서도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고 서원했습니다.
그야말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어느 시인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웬만한 사람이 그런 처지에 빠진다면, 속된 말로 ‘막 가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중에도, 자기 아내 말마따나
‘하나님을 욕하고 죽을’ 일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은 최악의 환난 중에도
말과 행동에서 그 어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의 겉의 육신은 이미 ‘죽은 자와 방불한’ 처지에 빠져 있었지만
그의 심령만큼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기운’을 멋지게 발휘함으로써
끝까지 자신의 ‘순전함을 굳게 지켜’내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큰 환난이 자기에게 닥치면 그것을 ‘좋은 핑계거리’로 삼기 일쑤입니다.
어차피 망친 인생이고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바닥까지 이미 떨어졌는데
그런 처지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나
저주 한마디 내뱉는 것이 무슨 대단한 죄가 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인생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불의’나 ‘궤휼’을 결코 행하지 않고
오로지 ‘의롭게’ 산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느냐고 악을 쓰는 것입니다.
아니 ‘환난’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의 ‘시험’만 생겨도
마치 아무 죄를 지어도 상관없는 ‘면책특권’이나 받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이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도
우상에게 결코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있었는데,
요즘 교인들은 그저 집안어른 아니 형님이 눈치만 주어도
당장 제사상 앞에 엎드리면서 속으로는 그냥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간단히 변명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중에서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던
마게도냐 교회들을 본받기는커녕, 현대교인들은 불경기만 살짝 지나가도
아주 당연한 듯이 헌금을 중단하면서
‘목회자도 장사를 해 보았더라면 내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을 텐데..’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코에 ‘성령의 기운’이 남아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자기 인생이 비참해 보여도 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내 코에 넣어 주신’ 생명이며
바로 이 순간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지속시켜 주고 계시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성령의 기운’으로 나의 생명이 영위되는 한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말 한마디,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일거수일투족이라도
결코 죄악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평소에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지만
특히 어려운 환난이 닥칠 때, 죽고 싶을 만큼 인생이 괴로울 때에도
그럴수록 더욱 이 ‘하나님의 기운’을 발휘함으로써
오직 ‘의를 굳게 잡고 놓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기운’이 있는 신자는 아무리 현재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여도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결말지으실 것을 끝까지 의지합니다.
▲7절.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7절의 “나의 대적”과 “나를 치는 자”는, 욥의 세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욥이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를 비웃었던 사람들,
특히 이전에 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지금 와서는 오히려 그를 배신하고 돌아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욥의 세 친구들도 욥을 정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악인”이나 “불의한 자”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자기를 치는 대적들이 “악인같이” 되고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였습니다.
▲8절.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이어지는 8절에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라고 했는데,
이것은 남을 속여서 치부하는 악인이 일시적으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할 때에는” 그런 악인에게
“무슨 소망이 있으랴”고 했습니다.
즉 불의하게 사는 악인이 세상에서는 만사형통하게만 보인다 할지라도
그가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는
그야말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오직 지옥 구덩이에 떨어지게 될 일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9절.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서,
그처럼 악인에게 영벌의 심판이 선고될 때에
악인이 아무리 탄원을 하거나 발악을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10절.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조금 의역하자면, 그처럼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 소용없을 최후심판대 앞에서가 아니라
‘세상에 있을 동안에 전능자를 기뻐하고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13절 이하의 내용은
바로 그와 같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악인은 반드시 현세에서 그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욥도 반드시 무슨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면서
욥에게 회개해야 한다고 압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악인이 현세에서 꼭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익’을 얻는 불공평하고도 부조리한 일이 더 많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이며,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최후심판에 가서 공의롭게 해결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욥은 지금까지 그 세 친구들이 자기를 정죄하는 말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전능자의 뜻”은 ‘악인을 이 세상에서 당장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취하시는 마지막 순간에 내리는 최후심판’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된다고 항변했습니다.
반면에 욥의 세 친구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허탄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그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기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기운’으로써
바로 이렇게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순전함을 지키며’ 살던 자신은 이처럼 최악의 환난을 당하게 된 반면에
‘사곡하게 행하는 악인과 불의한 자’들은 아무 재앙도 받지 않고
오히려 온갖 ‘이익’을 취하며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만 보이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욥은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바로 ‘하나님의 기운’으로써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불공평’하게 보이고 ‘불합리’하게만 여겨지는 일들을
결국 하나님께서 최후심판을 통해 완벽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악인과는 달리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끝까지 ‘전능자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불러 아뢰면서 살았던 의인’의 손을
들어 주실 것을 굳게 붙잡았던 것이었습니다.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항상 악당들에게 쫓기거나 때로는 아예 붙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그가 죽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관람객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에 가서는 정의의 편에 있는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런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에서
제임스 본드가 그런 온갖 위험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그 스릴을 느끼는 재미로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입니다.
진짜 ‘현실’에서는 ‘정의의 사도’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고,
‘악당’이 오히려 평생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고 잘 사는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만 생각한다면, 불신자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한 맺힌 채로 죽은 귀신’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기운’이 있는 신자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에 가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불공평’하게 보이는 일들을
공의롭게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금 당장은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꼬일 대로 꼬이기만’ 하는 것 같을지라도
끝까지 의인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불합리’하게 보이는 일들을
‘속 시원하게’ 종결지어 주실 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에게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이란 것도
단지 ‘최후승리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 주실 지를 아직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울 수는 있지만, 이 믿음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마저 ‘스릴’로 느끼면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 의인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도
절대로 도중에 죽지 않고 끝내 살아남고야 마는 일이
이처럼 ‘성령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기독신자에게는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으로써 매사에 ‘전능자를 기뻐하는’ 성도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결말지어 주시는 완벽한 ‘대단원의 막’이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당장 죽을 것 같은 최악의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성령의 기운’에 힘입어 ‘하나님을 불러 아뢰며’
의지하는 신앙을 지킴으로써 오뚝이처럼 다시 벌떡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운은, 다른 말로 포스
여러분, 소위 ‘포스 force’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는 ‘기(氣)’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내면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어떤 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요즘은 스타워즈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포스’라는 말이 워낙 많이 나오니까
다들 ‘기’라는 한자 대신에 그처럼 ‘포스’라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그런 상상 속의 ‘포스’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고 발휘할 수 있는 진짜 ‘포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을 때부터
바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생존 본능과 재생능력을 부단히 일깨워 주는 신비한 ‘성령의 기운’입니다.
바로 이 ‘영적 포스’만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자신의 순전함’을 지켜낼 수 있으며,
아무리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최후승리와 구원의 소망’을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라는 소설에 보면, 생텍쥐페리 자신이 비행기 조종사로 있을 때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서 불시착하게 되었던 경험담이 나옵니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그 메마른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인가가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기에, 생텍쥐페리와 기관사 프레디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지난 후에 동료 프레디가 더 이상은 가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때 생텍쥐페리는 “프레디, 우리의 목구멍이 아직 말라붙지 않았으니
더 걸어가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한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던 바로 그 결단과 의지 때문에
생텍쥐페리와 프레디는 얼마 후에 한 베두인 부족에게 극적으로 발견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목구멍에 숨이 붙어 있다는 그 한 가지만 가지고도
그처럼 끈질긴 생존본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기운’이 남아 있는 성도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신자야말로 정말이지 ‘절망은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내 인생이 회복불능의 한계상황까지 가 있더라도
‘내 속에 아직은 성령의 포스가 있다.’라는 사실만 확신하면
실로 ‘기적적인 생명 의지’와 ‘불사조와 같은 재생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신자야말로 이 ‘영적인 기(氣)’, 즉 ‘성령의 포스’를 통해서 나오는 정신력만 유지하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것이 더 나아보이는 처지에 빠지더라도 끝까지 ‘죽지 않아!’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극한 환난이 닥치더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님께서 유지시켜 주시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말이나 행실에서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이제 죽을 일밖에 남지 않아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저와 여러분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결국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고야 마실 것을 확신함으로써
한 번 더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운’에 힘입어서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원망하거나 범죄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절망하지도 않는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여 칠전팔기함으로써,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곤경을 돌이켜 주신 후에
그전보다 갑절이나 더 창대하게 되는’ 신앙생활의 멋진 역전승의 축복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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